한줄 詩

어쩌라고, 이 가을 - 오광수

마루안 2019. 11. 3. 19:19



어쩌라고, 이 가을 - 오광수



가을비는 만남보다 이별에 익숙하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나이
이 비 그치면 또 누군가가
땅거미를 틈타 이별을 고해올지도 모른다
낙엽 지는 숲길을 향해
산 자들의 가슴을 짓밟고 떠나가겠지만, 또 어쩌랴
가을 단풍은 서럽게 타오르다가 이내
낙엽으로 질 터인데
마음이나 한 자락 비워두고
가을 햇볕 쨍쨍한 날 기다려
꼬들꼬들 말려둬야겠다


가을 햇빛은 늘 사선으로 쏟아진다
명궁의 화살처럼 날아와 가을을 건너는
모은 이의 가슴을 명중시킨다
푸른 잎을 단숨에 붉게 만들고
까투리 한 마리 바람나서 둥지를 떠나게 하는
저 가을은 누구인가
수많은 가을을 보내고도
수줍고 가슴 설레는 이 가을엔
한 번쯤 환장할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디
살아 있다고 외칠 수 있을까


어쩌라고 이 가을은 십수 년이 지난 오늘에도
늙어 지친 심장까지 요동치게 하는지
내 허리를 부여잡고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지


철 지난 유행가 같은 가을



*시집,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 애지출판








맨 처음의 봄 - 오광수



봄꽃이란 봄꽃 다 피었을 때
우리 생도 피었으면 좋겠네
그늘 속 숨죽이던 이끼도
연파랑 꽃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네
산수유는 이미 노랗고, 개나리는 저리도 환한데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목련꽃 아래서 입맞춤 하던 순간 혼절하듯 숨을 멈추던 당신 시나브로 청춘은 시들어 이제는 꽃이 진자리 송홧가루 흩날리는 지상에서 아직도 네가 그리운 건 지병인거야

봄꽃이란 봄꽃 다 질 때
우리 생도 저물었으면 좋겠네
당신과도 그냥 지나는 소문처럼
찰나의 어디쯤서 스쳤으면 좋겠네
구절초 같은 남루, 먼지 쌓인 민들레인들 어떤가
화무십일홍 화무십일홍

맨 처음의 봄 꽃 진자리 꽃이 필 자리






# 오광수 시인은 충남 논산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6년 동인지 <대중시>로 데뷰했으며 동인시집 <그들은 다만 걸었다>에 작품을 발표했다. 2018년 월간 <시인동네>에 발굴시인 특집으로 소개 되었다. 오랫동안 경향신문사에서 대중문화 담당 기자로 일했다. <이제 와서 사랑을 말하는 건 미친 짓이야>가 첫 시집이다. 미술평론가 오광수 선생과 동명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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