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한 짐 - 이원규 별빛 한 짐 - 이원규 두 눈이 나빠져도 별은 보인다 빗점골에 쏟아지는 별빛들이 아까워 늦가을 다람쥐처럼 한 자루 가득 채웠다 이역천리 서울 가는 길 깡마른 몸 지게에 별빛 한 짐 지고 갔더니 와 이리 캄캄하노? 철 지난 노래처럼 슬슬 눈길을 피했다 인사동 뒷골목엔 내다버릴 곳이 .. 한줄 詩 2019.10.23
무릎 - 정윤천 무릎 - 정윤천 이 생에서는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다고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흐른 하루가 밖에 나갔다가 굵은 빗방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낮 동안 심하게 만지작거려 주었던 것 같았다 오래전 궁벽한 가계를 떠나올 때의 성황당 고갯길이 걸려 있었다. *시집, 발해로 가.. 한줄 詩 2019.10.23
닻을 내린 배 - 성윤석 닻을 내린 배 - 성윤석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나, 나의 배는 저 먼바다에 떠 있네. 일한 값을 받지 못한 나의 선원들이 몇 타고 있었지만, 녹슨 갑판이며, 찢어진 저인망 그물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네. 닻을 닮아 가을 올 때 피는 닻꽃 한 송이를 꺾어 바다에 던져두고 나는 부두.. 한줄 詩 2019.10.22
스무 살 슬리퍼의 퇴임사 - 서범석 스무 살 슬리퍼의 퇴임사 - 서범석 너는 떠나고 나 홀로다,를 햇살 밝은 방바닥에 펼친다 질긴 20년이 나를 허물지 않았느냐,를 닳고 해진 뒤꿈치에 새긴다 당신의 온몸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살았다,를 비스듬히 파인 뒤축에 숨긴다 너와 더 살더라도 너는 날 버렸을 거다,를 낡고 병든 몸.. 한줄 詩 2019.10.22
탈출기 - 권상진 탈출기 - 권상진 악수는 시간의 물살에서 서로를 건지는 유일한 방법 치매 병동 입원실 침대 맡에서 처음 뵙겠습니다 손 내미시는 아버지 죽음의 미행을 직감한 듯 떨리는 손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초면의 조력자가 덥석 손을 잡는다 첫인사는 나이를 다시 세는 리셋 버튼 같아서 우리는 .. 한줄 詩 2019.10.22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 배영옥 또 다른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을 - 배영옥 나는 끝내 의자 아래 묻힌 신전을 모를 것이고 의자 또한 나를 모를 것이고 의자 위의 사과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는데 나는 오늘도 의자를 기다리는 사람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애써 소환하는 사람 의자를 관(棺)처럼 떠받드는 사람 오래도록 .. 한줄 詩 2019.10.21
잣나무를 탓하다 - 한우진 잣나무를 탓하다 - 한우진 이 음식 저 음식에 고명, 고명하며 엄지 치켜세우더니만 서리 맞은 뒤의 열매가 최고! 비늘잣, 통잣 얹고 띄우고 후르륵거리더니만 큰비에 산사태가 잣나무 때문이라고 그것도 지난 정권(政權) 녹화사업, 소나무 아닌 잣나무 때문이라고 백김치 담글 때 전화로 .. 한줄 詩 2019.10.21
그대, 나의 명왕성 - 권천학 그대, 나의 명왕성 - 권천학 허블이 짚어낸 우주의 속내 빛인지 그늘인지 노랑인지 파랑인지조차 보여 주지 않고 단지 가장자리가 뭉개진 빛과 어둠으로 보이는 혹은 노랑과 파랑으로 보이는 색 덩어리가 모호하다 그렇다면 내 안의 명왕성은 얼마나 모호하단 말인가 혼신을 다하여 그대.. 한줄 詩 2019.10.20
은둔형 오후 - 유계영 은둔형 오후 - 유계영 맑은 날 비가 내리면 창밖을 봐주기를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도가 통했다는 것 거울은 긴 팔로 방의 꼭짓점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며 울고 웃는 한 사람을 지켜주려고 거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뿐이지 그러나 은둔자의 관심사는 오.. 한줄 詩 2019.10.20
몸, 연민에 닿다 - 김창균 몸, 연민에 닿다 - 김창균 마치 가택연금 당했던 것처럼 금기의 말들이 한꺼번에 튀어 나오는 시간 내 몸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 아니 내 입에서 가장 멀리 있어 닿지 못하는 곳 새벽에 깨어 탱탱하게 불은 저 안쓰러운 말들을 만져본다 저녁밥을 짓던 그녀가 왔다 갔고 골목에서 마주쳤.. 한줄 詩 2019.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