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지금 이 가을, 고맙다 - 황동규

지금 이 가을, 고맙다 - 황동규 산책길 언덕 양옆에 의젓하게 자리 잡고 선 자작나무들의 하얀 피부, 허나 지난 장마에 땅이 패어 길 위에 올려져 인간의 발길에 뭉개진 험상스런 뿌리들이 더 눈길을 끈다. 밖으로 나온 나무의 창자들, 땅속에서도 속은 속대로 썩혔는지 군데군데 쥐어짜듯 잘록해진 곳도 눈에 띈다. 내 창자도 꺼내보면 사람들 눈 돌릴 만큼 험상스럽지 않을까. 그러나 잠깐, 그건 그거고. 햇빛 가운데도 눈부신 이 가을 햇빛, 노란색보다 더 샛노랗게 길 양편을 색칠하는 저 은행잎들, 갓 말린 태양초 꼬리를 달고 맴도는 저 고추잠자리들, 산사나무 잔가지에 붙어 가볍게 산들대는 풍뎅이 등의 저 절묘한 녹갈색 광채, 하늘에는 몸 가볍게 줄이고 춤추듯이 흘러가는 구름 조각들. 고맙다. 밤에는 별빛이 서늘하..

한줄 詩 2019.10.30

낙엽은 사선으로 진다 - 정소슬

낙엽은 사선으로 진다 - 정소슬 한창일 때는 하늘만 우러러 제 몸 허공에 떠 있는 줄 까맣게 몰랐었는데 그러니 현기증도 당연히 몰랐었는데 하늘의 눈빛 돌연 써늘해져 시력이 쇠하고 기억도 차츰 흐릿해져 아아 떨어질 날 가까웠구나 이제야 시선 내리깔고 아래를 보니 전신으로 번져오는 현기증에 몸 가누기조차 힘이 겹구나 저 아래 땅을 기며 아장거리던 유년의 기억이 땅거미가 되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데 그간 이 높은 곳에서 어떻게 산 건지 꿈만 같아 도무지 겁이 없었어 겁도 없이 수직으로의 욕구만 꾸역꾸역 쌓아 올린 거야 현기증의 높이만큼 떨어질 것을 걱정해야 하는 이 지경에 와서야 과욕을 깨달아 그간 쌓아 올린 수직선을 사선(斜線)으로 허물며 진다... 진다... 수평선 되어 드러눕는다 다소곳 사선(四禪)의 품..

한줄 詩 2019.10.29

단풍 드는 법 - 김남권​

단풍 드는 법 - 김남권​ 단풍이 들면 나는 가슴이 젖는다 투명한 물속에서 핏물이 번지듯 한방울의 피가 섬처럼 떨어져 온몸을 밝히는 동안, 혈관 끝에 다다른 가을이 더듬더듬 울음을 쏟아낸다 햇살 하나로 백일 이백일 삼백일을 지나야 붉어지는 너는 백년을 두고 바라보아도 지치지 않을 작은 풀꽃이지만, 내 가슴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꺼지지 않고 내려온 한 잎의 불씨였다 일 년에 한 번, 제 몸의 뿌리부터 불을 질러 아낌없이 태우는 나무에 풀꽃은 운명의 불씨였던 것이다 한순간의 절정을 책망하지 마라 얼마나 절실하면 해마다 저를 책망하며 불씨를 되살리겠느냐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뜨거운 불길을 그렇게라도 쏟아놓지 않으면 홀로 까맣게 죽은 피를 토하다 하얀 물안개로 피어나 산기슭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

한줄 詩 2019.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