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마루안 2019. 10. 30. 21:46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찰과상 정도 가볍다고 생각한 나는 여전히 운동화 끈을 졸라매며
새벽을 내딛습니다 바람이 순합니다 발끝에 덜 여문 아침이 묻어옵니다
좀 더 속도를 낸다면 아침까지 내달릴 것도 같은데
새벽 산책로는 生을 사고파는
기대치의 가게처럼 늘 두근거리게 합니다


내 이전의 아우성
그것은 내 이전의 외침과도 같은 것. 어느 순간 욕망과 상관없는
일탈이 나를 첨예(尖銳)한 모습으로 만들어 종탑의 뾰족 지붕으로 살았습니다
이십대의 얘기였지요 고쳐 앉으면 가능성 없는 피안(彼岸)이기도 했습니다
운동화 끈이 이만큼, 풀릴 때도 되었는데 오지게 매듭처리가 된 듯합니다


지치면 등 뒤의 그리움이 말려 올라 무게가 되고 떠난 당신으로 하여 보푸라기도
한 움큼 묻어 날 것 같아 내 이웃도 놓친 한 발 한 발을 포장하여 산책로를 달립니다
나선형의 풀잎들도 하늘과 내통하면 여치며 메뚜기며 청개구리가 친구가 되고
구름 한 조각 똑 떨어지면 잠자리 유충으로 생과 결탁하고
아직 빛으로 남았다면
돌아올 적 산책로를 선회한 여름의 처음으로
당신을 만나기 전 그 해 여름으로
간절한 내가 보입니다



*시집, 비껴가는 역에서, 도서출판 미루나무








종이배 - 한관식



한때 종이비행기로 하늘을 날았네 몇 번 곤두박질치고서 배로 환생되었네


물에 기울지 않게 나무젓가락으로 돛대를 만들어 바람 타라 일러주던 그 마음 바다가 끝이라고 주저앉지 말라고


더 넓게 날아보라고 나, 강물에 띄워졌네


흐름을 따라가면 바다가 되리라 했네 어느 강가를 지나 마을을 지나 낙화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었네
느닷없는 돌부리에 걸렸네 나를 넘어뜨린 건 작은 조약돌이었네


바다에 닿기 전 강기슭 외진 곳에서 길은 끝났네 나는 종이배였네







# 한관식 시인은 1960년 경북 영천 출생으로 2007년 월간 <시사문단>으로 등단했고 한국문인협회 영천지부장으로 활동중이다. 불의의 사고로 왼손을 잃은 그가 턱걸이 하듯 버둥대며 쥐고 있는 것이 시다. 암담한 현실을 이겨내는 긍정의 토대는 문학이다. 첫 시집 <비껴가는 역에서>에 이어 두 번째 시집인 <밖은 솔깃한 오후더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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