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단풍 묘지 - 류정환

마루안 2019. 11. 2. 19:09

 

 

단풍 묘지 - 류정환


불치병처럼 가을은 속절없이 깊어져서
되돌리긴 틀렸다고,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 그곳에
한 무리 낙엽들이 모여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단풍 정류장, 흔들리며 한 생애를 견딘 얼굴들은
피를 나눈 형제같이 붉은 빛이었다.

바람이 끄는 마차가 도착하자 몇몇 낙엽들이 마차를 타고 떠났다.
차례를 다투거나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지만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다는 듯,
먼저 갈 테니 나중 오라거나
곧 뒤따라 갈 테니 어서 가라거나 하는 말들은
오가는 눈짓에 이미 담겨 있었다.

구름 속으로 마차는 사라지고
시나브로 붉게 물드는 하늘가,
볕이 잘 드는 언덕에 다사로운 마을이 있어
무덤같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체온을 나누는지
미처 나누지 못한 술잔을 서로 권하는지
젓가락 소리 불콰하게 번져 가는데

지상(地上)의 추억마저 희미해지면
그렇게 한세상 깜깜하게 저물고 마는 것이라 해도
자네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한잔 또 권하는지
자꾸 눈시울이 붉어지는 11월, 저녁 하늘가.

 

 

*시집, 상처를 만지다, 고두미

 

 

 

 

 

 

단풍 든다 - 류정환

 

 

단풍 든다.

단풍 든다.

가을이 깊으니 그리움도 깊어

동서도 남북도 없이 단풍 든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몸이 달아 달려드는 머슴애처럼

손을 빼다가 못 이기는 척 마음을 여는 계집애처럼

때가 되었다고 색동옷 꺼내 입고 나와

반가운 임은 언제 오시나, 기다리는 나무들.

 

산 같은 그리움에 저마다 귓불이 붉어지고

삽시간에 골짝마다 불이 이는데

온몸에 신열이 올라 붉게 달뜨는 국토,

갈라진 국토의 사무친 병을 좀 보아라.

 

하루 한나절 얼싸안고 후루룩 타고 말아

앙상하게 헐벗고 겨울을 맞을지언정

거기 두고 여기서 그리는 일

더는 못 하겠다, 더는 못 하겠다고.

 

그리하여 단풍 든다, 하루 한나절 잠시라도

한마음으로 오래된 약속을 확인하고 싶어서,

한마음으로 내일을 얘기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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