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잔치국수의 보수성 - 변홍철

마루안 2019. 11. 1. 19:43



잔치국수의 보수성 - 변홍철



스테인리스 그릇 넘치게 하얀 면발이 담겨 나오는
잔치 같지 않은 날에도, 시장 어귀 2,900원짜리 국숫집
왜 가난한 사람들은 이 따위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도
주뼛거리나, 몇 개 되지도 않는 식탁, 어디에 앉을지를
저렇게 한참 망설이나, 한 번도 초대받아 보지 못한
얽힌 삶의 사리 한 모통이를 지상의 가장 안전한 자리에
겨우 부려놓고, 구겨진 천 원짜리 같은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잔치국수 한 그릇씩 받아, 토하듯 우겨넣는다


고함 한번 질러보지 못한 사람들은
설움조차 내뱉기보다 차라리 후루룩거리며 빨아들이고
씹기도 전에 목이 미어져라 삼켜 버리곤
뚝,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오랜 잔치
저 남루한 이웃들은 그리하여
죽어라 여당만 찍어온 유권자들


이런 데서는 너무 크게 말하는 게 아니라고
어린 딸아이에게 짐짓 근엄하게 타이르곤
새로 산 머리핀을 가만히 만져 주며
뻐드렁니 드러내놓고 웃는 저 나이든 가장의 식탁 위에서
초복의 정오, 질긴 뙤약볕 한 뭉치가 잠시 풀리듯이



*시집, 사계, 한티재








백로(白露) 무렵 - 변홍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또 살았느냐고


아름다운 음악과 아름다운
여인들이 별처럼 많아


별처럼 많은 순간들을 사랑하느라
바빴다오


아침이면
당신이 누웠다 떠난 자리마다
몸의 굴곡 흔적을 따라
이슬 맺혀 있으리


임대료를 내지 못한 우리 生의 현(絃) 위로
새로운 계절이 활처럼 흐느끼어


눈물이 눈물을 자꾸만
풀벌레 소리로 불러 모으는


강물 소리 출렁이는


드보르자크
첼로협주곡 b단조






# 변홍철 시인은 1969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자랐다. 고려대 국문과에서 공부하며 동인지 <저인망>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어린 왕자, 후쿠시마 이후>, <사계>가 있다. 도서출판 한티재 편집장,  대구경북작가회의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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