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법의 시간 - 최영미

마루안 2019. 11. 3. 18:39

 

 

마법의 시간 - 최영미


사랑의 말은 유치할수록 좋다
유치할수록 진실에 가깝다
기다려찌
어서와찌
만져줘찌
뜨거워찌
행복해찌

유치해지지 못해
충분히 유치해지지 못해
너를 잡지 못했지
너밖에 없찌,
그 말을 못해 너를 보내고
바디버터를 덕지덕지 바른다
너와 내가 함께 했던
마법의 시간으로 돌아가고파

망고와 파파야 즙을 머리에 바르고
올리브오일로 마사지하고
싱그러운 페퍼민트와 장미꽃 향으로
중년의 냄새를 덮고
어미의 병실에서 묻은 기저귀 냄새도 지우고
기다려찌
너밖에 없찌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 아미출판사


 

 



낙원 - 최영미


"인생은 낙원이에요
우리들은 모두 낙원에 있으면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지요"

카라마조프 형제의 말을 베낀 그날은
흐린 날이었나, 맑았다 흐려진 하루의 끝,
까닭 모를 슬픔이 쏟아지던 저녁이었나

아낌없이 주는 나무 밑에서 낙엽을 줍던 소녀에게
습픔도 고독도 핑크빛이었던 열다섯 살에게
가장 먼 미래는 서른 살이었다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던 서른을 넘기고
오십이 지나 뻣뻣해진 손가락으로 쓴다
어제도 오늘 같고 오늘도 내일 같아 
달력을 보지 않는 새벽,

인생은 낙원이야.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는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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