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깥으로부터 - 황규관

마루안 2020. 2. 3. 22:12



바깥으로부터 - 황규관


이제는 아무도 바깥을 보지 않는다
고속 열차의 창문에는 언제나
어둑한 블라인드가 쳐져 있고
이 옷을 입었다 저 옷을 입었다 하는 가을 산은
버려지듯 지나가고 있다
바깥을 바라보는 일은
바깥에게 나를 조심스레 허락하는 일
내가 바깥이 되고 바깥이
도착지를 변경해주는 일
그러나 아무도 바깥을 보지 않는다
메말라가는 산자락의 밭을
혼자이게 내버려둔다
눈동자는 바깥의 흔적
영혼은 바깥이 쌓아올린 오두막
누구도 바깥이 되려고 하지 않을 때
바깥은 버려지고
안은 점점 작아져간다
모래알처럼 작아져간다
흙먼지처럼 떠돌기만 한다



*시집,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문학동네








국수 한 그릇 - 황규관



여섯 살 무렵, 동네 골목에 있는
국수 공장 문턱에서 하루해를 보낸 적이 있다
국수 한 그릇도 여의치 않았던 시절
기계에서 신기하게 쏟아져 나와
옥상에서 하얗게 물결치는 국수발을
한 올 한 올 가슴에 새기다보면
설움이 뭉쳐 있는 가슴으로
김이 모락모락 들어올 줄 알았을까
해질녘에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에게
네가 거지새끼냐며, 매타작을
결국 치러야 했지만
울음의 끝자락에서
국물에 멸치 대가리 하나 없는
국수 한 그릇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날 밤 꿈도 없는 잠에 들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설움을 먹고 산다는 걸
그곳을 떠난 한참 뒤 어느 길 위에서
유성처럼 알게 됐지만
지금도 국수 한 그릇 앞에 앉으면
그 청빈한 시간이
오늘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피 한 방로 와서
거적이 될 때까지 사는 존재라는 듯
꿈이 없어도 길을 더 갈 수 있는
다른 몸이 흘러오는 것이다






# 황규관 시인은 1968년 전주시 교동에서 태어났다. 제철소에서 일하며 쓴 시로 전태일문학상을 받고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활동했다. 시집으로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