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노인이라는 잠언 - 조항록

마루안 2020. 2. 5. 19:36

 

 

노인이라는 잠언 - 조항록


노인이 바퀴 달린 의자를 밀며 간다 어디서든 쉴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등이 굽고 손가락이 굽고 오후의 햇살이 다 구부러지면 시나브로 숲에 다다르리라

저녁은 향기로운 흙냄새에 물들며 얌전한 맥박같이 이어진 오솔길에는 이미 인적이 끊겼다 나뭇잎을 두드려보아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 산새들은 다친 날개를 접어 둥지에 들고 별빛은 심연으로 잠기고

노인은 알고 노인이 아닌 사람들은 모르는 척하는 것 슬픔도 혼자 즐거움도 혼자 너는 나를 모른다는 것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입춘 - 조항록


밤새 비 내려 유리창이 푸르다
계절은 사람보다 다채로운 음계를 밟고 달라진다

봄이 온다,
도돌이표 많은 악보를 들고 왔던 너처럼

나는 봄의 겨울에 얼굴을 비추어
여태 들러붙은 서리를 닦아낸다

처마가 사라진 마을에서
지난날은 밤새워 고스란히 젖었겠지
가로등도 젖어 길마다 발간 불빛이 흥건했겠지

너의 음악은 아름다웠지만
나는 가볍지 못했다
추위는 지루했고
먹물을 쏟듯 한꺼번에 밤이 찾아오고는 했다

그래서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차가운 바람벽에서 바싹 말라붙은 안개꽃을
오랫동안 내다버리지 못한 채 겨울을 지났다

봄은 온다,
깊은 숨을 불어넣는 악기를 좋아하던 너의 기척처럼

수평(水平)의 봄이
동정(童貞)의 봄이
보일락 말락 겨드랑이 간지러운 봄이 온다

경적을 울리지 않고 간밤에 비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