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름이라는 망명지 - 이은규

마루안 2020. 1. 28. 22:45



구름이라는 망명지 - 이은규



오랜 소원은 울기 좋은 방을 갖는 것


새가 난다, 허공을


날던 새가 보이지 않는 건
구름이라는 망명지로 숨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슬점을 꾹 참으며 흘러가는 방, 구름
새는 왜 비 내릴 징조로 가득한
양떼구름으로의 잠입을 감행했을까


구름과 이슬점 사이에 희비극이 있다면,
이상한 막간극이라는 그의 희곡은 차라리 묘비명
세번째 아내를 맞이하던 즈음
그는 세 개의 문을 가진 작업실을 꾸민다
망명지로의 잠입 절차는 늘 까다롭고,
무덤 같은 방에서
또 한 편의 희비극이 완성되고 있다


망명에 들고 싶은데,
내일은 오늘의 잠입이 실패했다는 증명의 날이 될 것


세번째 문을 스스로 열고 나올 때까지
아무도 망명자와의 접선을 이룰 수 없었다는 그의 방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아껴놓는다
망명 사유는 막간극 사이에 있고
양떼구름, 다만 흘러가는 것으로 이슬점을 견딜 뿐


해질녘 세번째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아내
종종 그의 뺨에 남은 이슬점의 흔적과 마주했을 것이다


나에게로의 망명은 멀고
구름 속, 젖은 날개의 새에게
목이 부러지게 내가 그립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시집,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문학동네








삼한사온 - 이은규



손바닥 위로 내려앉은 눈송이
뒤늦은 안부에 입김을 불어넣으며
타들어 가는 심지 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송이야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렴


다짐하는 사이, 삼한사온의 법칙
때때로 춥고
때때로 따뜻하다


견딘다, 다만 나무는 겨울 하늘 아래 서 있을 뿐


당신이라는 절기, 다짐하는 사이
때때로 따뜻하고
때때로 춥다


눈의 아름다움보다 아름다운 눈이 있을 뿐
그러나 눈의 아름다움도
아름다운 눈도 없는 상황이라면
다짐이란 실행하느냐, 실행하지 않느냐
둘 중 하나라는 간명하고 절실한 것


저멀리 빛이 차오르는 곳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나는 행복이야, 나를 잡아보렴


기상예보관처럼 당신은 말했다
날씨는 절대로 좋아지지 않아 혹은 상황은
날이 갈수록 나빠질 거야, 그럼에도


진리는 눈보라와 같고
운명은 그 소용돌이 안에서 저 혼자 반짝반짝
먼 곳에서 보내온 문장
이곳 겨울은 공기 사이에서 희미한 장작 냄새가 피어오릅니다
너무 늦게 도착한 안부, 그럼에도


저기 흰 도화지와 같은 세상 한 장 펼쳐져 있다
검은 펜으로 무엇을 지울까, 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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