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날은 간다 - 최성수

마루안 2020. 5. 21. 19:15

 

 

봄날은 간다 - 최성수


잘 있거라, 눈부신 새잎의 시간이여
숲 아래서 더 깊어지는 그늘의 자리여
오래 춥고 잠시 따사로웠던
짧은 시절은 이렇게 잠들고 말리니

냉이꽃대 단단하게 힘 오르고
잡초들 더 굳세게 땅바닥 움켜쥐고 견디는
땡볕의 시간이 저기 다가온다

피어서 사랑스럽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봄날에 빛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 또한 그렇게 사랑스럽고 빛났으니

이제는 툭툭 자리를 털고 떠나야 할 때
그러니, 잘 있으라
덧없고 쓸쓸한 시절 또한 잘 있으라

꽃은 지고,
바람은 불고,

이렇게
봄날은 간다


*시집/ 물골, 그 집/ 도서출판 b

 

 

 

 

 

물골*. 그 집 - 최성수


종일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물골 그 집에 앵두꽃 피었다
문은 잠겨 있고
저 혼자 봄바람에 팔랑거리는 현수막
'감자전 한 접시 (3장) 1만원'
소주 한 병은 공짜란다
주인은 없고 큰 개 한 마리
멀뚱멀뚱 낯선 이 바라보는
그 시선도 이승의 것 같지 않은 봄날 하루
먼 데서 밭 가는 트랙터 소리만
잠든 햇살을 깨우는데
뒷산 솔바람 갓 핀 진달래 꽃잎만
간질이는데

주인장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핀 앵두나무 그늘에 앉아
꽃내음 안주 삼아 낮술을 기울이면
천천히 흐르는 시간, 느릿느릿 지나는 바람
사는 일은 더없이 막막하지만
때로 이렇게 흔들흔들 건너가는 것도
그저 헛된 일만은 아니라고 속삭이는

이 세상 풍경 같지 않은
물골 그 집에 앵두꽃 혼자 핀
이 봄날


*물골: 강원도 평창군 수동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