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 목소리 - 조성국

마루안 2020. 5. 21. 19:22

 

 

저녁 목소리 - 조성국


고매(古梅)향 걸터앉은 툇마루
호듯호듯 끓는 볕살이 좋다 치자
빗밑이 무거운 연둣빛 파초 잎
빗방울 긋는 소리도 좋고,
누렇게 욱은 솔이파리 가만 뒤흔드는 오랍들의
바람 소리도 좋다 치자
한껏 달빛 내비치는 대밭
나직이 서걱대는 이파리 소리도 좋고
갓밝이 무렵이나
어슬막 고샅 탱자울에서 재갈재갈거리는 오목눈이
참새 소리도 좋다 치자
제아무리 좋다 쳐도
풀어놓은 닭들을 구구구 불러 모아 먹이를 주는,
주린 집개가 허천뱅이별을 바라보며
눈동자 빛내는
그맘때를 훌쩍 뛰어넘어 실컷 놀던 나한테 하얗게
새하얗게 밥 짓는 연기 나지막이 펴져 오듯
밥 먹으라, 데리러 오는 저녁 목소리가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시집/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 문학수첩

 

 

 



봄밤 - 조성국


대뜸 찾아와서는
승속이 다 밴 옛사랑
다짜고짜 방문해서는
냅다 손목 낚아채
배롱나무 뒤뜰로 이끌던 사내의
입맞춤을 엿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푸릇하니 부풀어 오른 달빛에
방 안 윤곽이 어렴풋 드러나는 저녁
소쩍새 울음에 잠 못 이루는 불목하니
검지 끝에 침 발라
꽃살문 창호지 문구멍을 자발머리없이 뚫고
어리붉게 훔치며
마른침을 꼴깍, 삼키는 바람에
문종이 덧대어 바른 불두화 꽃잎
비긋이 피었다 져 버린 것인데
괜히 묵은 배롱나무만 몸을
비비 꼬아 틀었다


 

 

# 조성국 시인은 1963년 광주 염주마을에서 태어났다. 199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그머니>, <둥근 진동>, <나만 멀쩡해서 미안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