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물 한 끼 - 이서화

마루안 2020. 5. 25. 22:03

 

 

눈물 한 끼 - 이서화

 

 

봉분 가득한 씀바귀 줄기에서

낯익은 머리카락 냄새가 난다고 바람이 쓴맛을 키우며 아는 체를 한다

맨 마지막에 챙겨 간 늦가을의 기억 잊지 않으려

엄마는 해마다 씀바귀 김치를 마련한다

이파리마다 꽃 진 자리마다

아직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뽀얀 젖줄을 쟁여두었다

봄바람을 보태 손으로 뽑으면 쉽게 뽑히는

엄마 잔소리 같은 씀바귀

 

몇몇이 둘러앉아

금방 버무린 씀바귀 김치를 먹는다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쓴맛에 목이 메면서도 몸에 좋다고

말대답하듯 설탕을 뿌리고 식초를 붓는다

참, 맛있다

참, 맛있다 말은 엄마에게서 처음 들었을 것이다

 

잘 삭은 울음은 형체가 없다

나름 세상의 쓴맛 단맛 다 보았다 생각했는데

왜 엄마라는 말은 눈으로 간을 보는 것인지

왜 짭짤한 눈물 맛을 입안 가득 맛보는 것인지

엄마 잔소리는 쓰기로 유명했다

한 번쯤 가출을 꿈꾸게 했던 그 쓴맛

생전에 씀바귀 김치를 잘 해주셨는데

저승에서도 농사를 지으시는지 산소는 씀바귀밭이다

달달한 나이의 자식들 둘러앉아

쓰디쓴 김치를 반찬으로 눈물 한 끼 먹는다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부론 - 이서화

 

 

느릿한 길이 지나가던

부론, 이젠 예전이 되었지만

뒤늦게 나타난 외각 길을 택하지 않는다면

부론을 만날 수 있다

부론은 내외곽을 가리지 않지만

아직 외각은 강물 소리와

오르막으로 헉헉대는 산의 소속이다

오래전에 번잡을 경험한 부론 시내는

지금은 단촐한 시기다

무엇이든지 두 개 이상은 없는 곳

벚나무 사이로 보이는 다방도 철물점도

보건소도 딱 하나씩 있다

깊숙한 내륙까지 흘러온

물소리를 헹구다 보면

누구든 한철을 견디지 못하고

철물점으로 달려가 자물통을 사고

열쇠 따윈 강물에 던지는 곳이다

강물 위를 맴돌던 새 떼들은

강 건너편 메아리 틈으로 숨고

저녁노을이 단풍과 섞이는 절벽을 본다면

저곳에서는 자칫, 짧은 적요에도 발목을 다칠 수 있다

웅크리듯 말을 집어넣는 곳

매운탕집들이 연기처럼 숨어있고

한 번쯤 바짓단을 접고

첨벙거리는 천렵의 기억이 떠오른다면

부론엔 양은 솥뚜껑을 들썩거리던 시절이

여전히 들끓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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