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산색 - 손택수

마루안 2020. 6. 9. 21:51

 

 

산색 - 손택수


산등성이의 신록이 등성이 너머로 번진다
산빛이 산을 벗어나서
공제선 너머
무한으로
산을 넘치게 하는 것 같다
번지는 산빛으로 하여 산이 흔들흔들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저 색을 뭐라고 불러줘야 하나
능선 밖으로 뿜어져나오는 색, 있는데
틀림없이 없는
저 빛깔,
툇마루 끝에 나앉아 해종일
앞산을 보고 있던 노인의 말년이 마냥
적적기만 한 것은 아니었겠다
가만히 앉은 채로 저를 넘어가는
넘어가는
산빛
떠나온 들판을 쓰다듬으며
쓰다듬으며 온다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응달 - 손택수


그늘이 만든 위성, 스란치마 스적이는 소리가 난다
나는 그 안에서 감꽃 목걸이를 한 계집아이,
우물을 울림통으로 지하 깊숙이 혼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실로폰 소리를 내는 물방울이 뚝뚝 수면을 두드리고
한낮에는 누가 등목을 하는지
물이 까무러치는 소리가 날 때도 있다
얼마나 오래 들여다보았으면
주위의 땅빛과는 아주 다른 색을 갖게 되었을까
지상을 쓰다듬고 쓰다듬되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은 자의
기록이 저와 같다면

응달이 뜬다 일찌감치 저물어서
이끼에 슬어놓은 이슬처럼
빛이 나는 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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