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 한승원

마루안 2020. 6. 10. 19:03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 한승원

 


토굴 뜨락의 욱 자란 철쭉나무 우듬지를 자른다
꽃이 화려 찬란하다는 오만처럼
우주를 온통 제 꽃만으로 장식하겠다는 탐욕처럼
헌걸찬 그들의 세력지,
무엄한 그들 군락 속에
토굴 주인의 번뇌 너울처럼 자생한
찔레나무와 산딸기와 쇠무릎과 모시풀과 팽나무와
억새풀 띠풀의 줄기들,
초여름 들어 미친 듯이
들솟는 죽순도 자른다 올곧음과
실바람 한 줄기에도 소곤거리는
푸른 물 뚝뚝 듣는 중얼거림과 낄낄거림과
창문에 비치는 수묵화 같은 그림자를 즐기려고 장려한
솜대나무가 토굴 주인을 압박하는 괴물이 되어 있다
서재의 방바닥과 바람벽 사이에서 죽순 하나가
식인종의 창처럼 들솟은 적이 있었다
덧거친 겁박 속에서 토굴 주인이 살아가는 것은 싸움이다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시집/ 꽃에 씌어 산다/ 문학들

 

 

 

 

 

 

죽음의 씨앗 - 한승원

 


밤새도록
서너 번 만에 한 번씩 멈추곤 하면서
지친 듯 흐느적거리는 부정맥이 이어진다
80 넘었으니 살 만큼 살았느니라
늙은 시인은 답답해지는 가슴을 달래며
이제는 다 버리고 향기로운 연꽃으로
피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튿날
검은 우산을 받쳐 쓰고 칠월의 땡볕을 뚫고 허위허위
연방죽으로 갔는데, 수천 송이의 연꽃들이 바람에
한들한들 향기를 뿜고 있었는데
연방죽 어구의 쟁반만 한 검푸른 연잎 한복판에
금방 흘린 이팔 소녀의 초조(初潮) 같은 꽃잎 하나
꽃판에 박혀 있던 부분이 하얀
연분홍의 꽃잎은 사실 죽음으로 가는 씨앗일 터인데
하늘에서 내려온 뜻과 땅에서 솟구치는 훈기가 만나는
어름에 그것은 고요히 누워 있었는데
나의 마지막도 이렇듯 슬프면서도 곱고 찬란할 수 있을까

 



 

*서시

사막을 흐르는 홀로그램의 시간 - 한승원

 

사막을 건너가는 늙은 낙타는, 일렁이는 강물 같은

신기루가 눈을 어지럽히고 모래바람이 몰아치면

바위를 산정으로 굴리고 올라가는

늙은 시지포스 노인이 된다

눈이 침침하고 다리가 천근만근이지만

흰 옷 입고 코와 입을 수건으로 가린

어리 미친 주인을 등에 태우고 가는 늙은 낙타는

당장 주저앉아 죽음처럼 깊은 잠으로 미끄러지고 싶고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고 싶지만

아직은 인내하며 더 가야 한다

맑고 차가운 물로 목욕하고 포도주 마시고

집시들과 더불어 달과 춤과 노래와 사랑을 즐기려고

오아시스를 찾아가는 주인을 위하여 사력을 다해야 한다

해는 지평선에 머물러 있고

희번한 듯 불그죽죽한 백야가 시작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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