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름나무 아래 - 조현정

마루안 2020. 6. 12. 19:03

 

 

여름나무 아래 - 조현정

 

 

가장 가까운 전생이 왜 이리 먼가

 

바람이 슬어놓고 간 햇살

뒹구는 씨앗 한 줌 삼키고

바깥마루에 누워 나무 한 그루 낳았다

 

나무는 쿨럭이며 

엄동설한 뒤 찾아온 봄을 끌어안더니

여름 꽃을 좋아하는 여자와 입을 맞추었다

 

저녁 바람에 뿔질하던 나무는

어둠이 오길 기다려 목을 풀고

별 나비 불러모아 화음을 연습했다

 

당신은 어디만큼 왔을까

 

까치발로 선 나무는

자꾸만 화장실에 먼저 가고 싶고

가사는 하나도 외워지지 않았다

 

망가진 자전거 끌고 돌아오는 옛집

여름 나무 아래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은빛 목화 세레나데

 

 

*시집/ 별다방 미쓰리/ 북인

 

 

 

 

 

 

별다방 미쓰리 - 조현정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

좁은 계단을 오르면

흘러간 드라마처럼 껌을 짝짝 씹으며

까만 속눈썹 울려붙이는 그녀가 있지

 

커다란 서양 여자들이 드잡고 뒹구는 프로레슬링에 빠져

빨강머리도 되었다가 노랑머리도 되었다가

누가 이겨도 상관없는 경기를 치르며

전화벨이 울리면 뽕브라를 치키곤 하지

 

하나뿐인 통로 내려가면

딛는 곳마다 허방이라

누런 별 다닥다닥 붙은 천장에

매일 밤 사다리를 놓는 미쓰리

 

바다가 보이지 않는 바닷가

별다방에 가면

가난한 기억 너머 어디서건 꽃으로 태어난 딸이건만

까만 바닷가

홀로 반짝이는 별이 되어가는

내 사랑 미쓰리가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