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의 기억은 서로 달라 - 배영옥

마루안 2020. 6. 16. 22:47

 


우리의 기억은 서로 달라 - 배영옥


너는 동사서독에서 복사꽃을 보았다 하고
나는 그곳에서 푸른 바다를 보았다 했네
바다는 떠돌이를 부르는 주문처럼
보이지 않는 섬을 옮기면서 이동하고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랑은 영원할까
우리의 희망도 동사서독 필름처럼 다시 재생할 수 있을까
우리의 기억은 모두 다르고
모래처럼 줄줄 흘러내리는 기억은
남은 인생을 어디에 의탁해야 할지 알 수 없으므로
나는 천상의 복숭아를 훔치는 동자처럼
기억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기억 또한 나를 믿어 의심치 않기를 바랐네
나는 동사서독에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았고
너는 복사꽃 향기에 매혹당한 이십대를 보냈다 했네
그러므로 우리의 기억이 서로 합치하는 순간은
지금 함께하는 이 순간도 아닐 것이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눈알만 굴러다니던 혁명 광장의 새처럼 - 배영옥


매미가 빠져나가고 남겨둔 껍데기에는
별의 항로가 새겨져 있다는데

그것은 어떤 미지의 길을 엿본 자의 일갈이 아니었을까

내가 가는 곳마다 새가 따라왔다
노란 새 한 마리가
맑고 날카로운 새소리가
파닥거리는 날갯짓이
키 큰 야자나무의 둥지가
그늘을 버리고 그늘을 지으며 나를 따라왔다

나는 이미 실패했다
새의 시선은 점묘법처럼 선명하고
새의 발자국은 진흙 속에 박힌 듯 뚜렷했다

내가 너를 찾아나선 게 아니었으나
나도 모르게 너를 불러들인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밤새 새의 기도를 필사했다
어젯밤 꿈이 다가오다가 노란 새를 보고 도망갈 때까지
불면의 불침번을 섰다
마음의 지도를 함부로 열어 보인 것이 아니었다

새가 다녀갔다
밤새 눈알이 노란 새 한 마리가
내 몸에 깃들었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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