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흑백 추억 - 최서림

마루안 2020. 6. 9. 22:17

 

 

흑백 추억 - 최서림

 


낡은 <성문종합영어> 책갈피에서
툭 떨어진 첫사랑 사진 한 장,
빛바랜 편지지에 싸여 있다.
마른 장미 바스락거리는 향기가 난다.
이사 다닐 때마다 몰래 숨어
내 방에서 사십여 년을 동거해왔구나!
꿈속에서처럼 조금도 늙지 않았으나
마른 장미같이 조금은 쓸쓸해 보였다.
세상 안으로 꺼내면 금방 바스러질 것 같아
낡은 편지지에다 곱게 다시 싸서
내 몸 가장 깊은 곳에다 숨겨주었다.

 

 

*시집, 사람의 향기, 시와에세이

 

 

 

 

 

 

감꽃처럼 - 최서림

 

 

무심코들 밟고 지나가는 감꽃을 보면
감꽃 같은 엄마가 아슴아슴 떠오른다.
박수근의 아낙네들처럼
눈에 띄지 않게 살다 간
엄마 생각에 내 생(生)이 젖어온다.
해는 길고 시락죽도 떨어진 날,
감꽃을 주어주던 애잔한 얼굴로
막내를 잊지 못해 꿈으로 찾아온다.
아기 배꼽보다 작은 감꽃들도 암술, 수술
갖출 건 다 갖추고 이 세상에 왔다.
벚꽃한테는 없는 단맛까지 품고 있다.
세상에 감꽃처럼 주저 없이
입안에 넣을 수 있는 꽃이 그리 흔하던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 한승원  (0) 2020.06.10
전생에 두고 온 - 김인자  (0) 2020.06.09
산색 - 손택수  (0) 2020.06.09
밥 한번 먹자 - 황형철  (0) 2020.06.07
천 년 후 - 박철영  (0) 2020.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