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뿌리, 하고 말하면 - 황형철

마루안 2020. 7. 30. 21:48

 

 

뿌리, 하고 말하면 - 황형철


태풍 언저리에 회화나무 송두리째 몰골 드러냈다 맥아리 없이 한 방에 훅 간 것이다 평소 조경에 식견이 있는 모 씨가 말하기를 겉만 번지르르하지 스스로 뿌리 못 내린 탓이란다 영양제 잔뜩 맞춰 덩치만 키우기에 급급해 태생이 편편약골인 것이다

하물며 풀 한 포기도 뿌리가 굳고 실해야 하는 법이어서
마땅히 땅의 습성 충분히 익히고
땅이 받아들인 밤낮의 시간을 체득해야 하는 것
가장 막막한 곳에서 가장 힘차야
어둠을 열고 더 깊숙이 내려갈 수가 있어
비로소 단단히 흙 붙들 수 있는 것
짱짱하게 줄기 키워 꽃도 피울 수 있는 것
땅에 스민 그림자와 땅이 딛고 있는 허공까지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와 함께
하세월에 풍파도 견디며 내공을 쌓은 후에야
나이테를 두텁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삼사백 년쯤 거뜬히 살아낸
고목의 장구한 생애도
하중을 견디다 못해 내려앉은 우람한 가지도
꾹꾹 적막 참아낸 뿌리가 밀어 올린 것이니
뿌리, 하고 말하면
망망한 우주의 한쪽이 슬쩍 열리는 듯하다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공짜, 세화에서 - 황형철
-섬6


긴 문장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읽느라
일없이 자리를 지켜도 텃세가 없고
청명 지난 앵두나무 이파리 같은 바다도
망망한 대양을 끈질기게 건너온 바람의 인내도 공짜
수평선 퉁기면 음치도 명가수가 되는 거라
무작정 돌고래 떼를 기다려도 지루할 겨를 없고
썰물이 가져간 아들의 발자국은
이르면 오늘밤 형형한 별로 뜰 것이니
해녀자리 문어자리 당근자리
그럴싸한 이름도 붙여줘야지
언제인가 이 시간도
오래된 소묘처럼 희미하고 말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이 모든 게 공짜

애먼 짓이라 탓해도 괜찮아
세화리 바다를 앞에 두고 앉은 나는
말간 원고지를 뭉텅이로 얻은 셈이니
무슨 말을 채울까 고심을 거듭해보는
여름날의 근사한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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