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마 이후 - 김정수

마루안 2020. 7. 29. 22:39

 

 

장마 이후 - 김정수


늘 꽃이 지나다니는 길이었다

신호등이 바뀌자
우산 세 개를 든 중년 사내가 뛰어갔다
우산 두 개를 든 여자와 늙은 사내가 애타게
애처롭게 뒤를 돌아보았다 건널목 중간에
다리가 불편한 늙은 여자와 중년 사내가 섬처럼 서있었다
맹렬하게 차량들 쏟아지는 길 위에서
중년 사내가 늙은 여자의 젖은 머리를
연신 매만지고 있었다

내부순환도로에서 떨어진 빗물이
파문에 찰방거렸다 붉은 눈에 걸려든 발이
틈, 사이에서 서성거렸다 꽃은 아무리 많아도
빈 곳을 다 들여다보진 못했다
내가 그토록 사거리 건널목에 붙박인 것도
처음이었다 엄마는 저리, 노인요양병원 침상에서 6년을 멈춰있었다
입관하고 난생처음 만져본 얼굴은 차갑고
차가웠다
하마터면,

오래오래 뭍으로 건너온 늙은 섬을
"엄마" 하고 부를 뻔했다


*시집/ 홀연, 선잠/ 천년의시작

 

 

 

 

 

 

신발 - 김정수


최후의 순간 버림받아
죽음을 증거하는 삶도 있다

끝까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에 바람 더듬어 과거를 뒤집기도 하지만
발견되는 순간까지
종이 한 장 밟고 서있는 기막힌 후생이다

망설이고 서성거린 모서리의 시간이
참 외롭고 무서웠을 것이다

파르르, 다 전해졌을 것이다

뛰어내리다 나뭇가지 붙잡고 발버등 치는 걸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혹여 바람에 훅, 날릴까 봐
조바심 냈을 것이다 

나도 한때 섰던 그 자리
오래 바닥을 끌고 온 삶이
벼랑 끝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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