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서성이는 묘지 - 안숭범

마루안 2020. 8. 31. 22:31

 

 

서성이는 묘지 - 안숭범

 

 

벌초를 끝내자 단정한 죽음이 뒤챈다
먼 길 돌아가야 하는 여름밤이어서
풀벌레가 나를 불러 세우는 간격으로
살 오른 불안이 그때의 부음을 다시 앓는다


만약이란 약을 종종 복용해 왔다


오늘은 내가 사라진 이후의 우주에 대해
생각한다, 안으론 가뭄이었으나 물푸레나무처럼
이라고 쓰인 묘비명을 중얼거린다
자기가 모르는 시간에 이빨을 가는 영혼이 있었노라고
허나 자격 없는 그리움 한 줌 받았으므로
괜찮다, 하고 얼버무리자 하산하는 길이 정연하다


연필심이 부러지고 나서야
끄적이는 일을 생각하듯이


낡은 터미널엔 매미가 몸 뒤채며 지핀 가냘픈 바람
외등 곁에선 용케 부딪치지 않고 서로를 흠모하는 벌레들
자물쇠 채워진 자전거만 홀로 시간의 귀를 쓰다듬고 있다
자물쇠도 걸어 놓지 않은 마음에 관해
항상 기다림을 연습하던 엄마에 대해
이미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타야 할 시간이지만


오지 않는 버스와
오지 않을 버스에 탄 사람에 대해


누구든 이름 붙여지기 전의 섬처럼 남겨진다
나와 이 여름밤을 여기 두고 간 사람아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문학수첩

 

 

 

 

 

 

낙원상가(樂園喪家) - 안숭범
-늙은 기타리스트를 위하여

 

 

입구에선 날지 않는 새 저들끼리 동맹하네
노래가 추억을 골라먹기 직전의 풍경이네
모르는 사이 조금씩 솟는 전봇대
견고하게 지구를 고정해 보려 하지만
전선을 타고 내보낸 소식은 살아 오지 않네
여기서 음악으로 들어가 꿈을 돌아
그대에게 간 적 있네
먼지들이 앞다퉈 레코드판 스크래치를 보듬어 주네
늙은 기타리스트는 찬밥에 열무김치를 아작아작 먹네
밖에선 소리를 옮기는 바람들 대기하지만
다 비운 밥그릇에서 누룽지가 눌어붙는 퐁경 쪽으로
그대가 접어 보낸 그때의 동정 도착하네
레스폴과 스트라토캐스터 사이에서
어떤 계기를 기다려 단박에 날아오르는 새 떼 편에
이 소릴 부치고 싶었네
다친 새의 날개를 바꿔주고 싶은 날은 그렇게 오네
주인 잃고 주소마저 잃은 흉가에 살면서도
여전히 살아오네
알 수 없는 소리로 읊다보면 낙원이 될까 싶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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