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경창파 - 박미경

마루안 2020. 8. 31. 22:23

 

 

만경창파 - 박미경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밀려난 사랑초
명주실처럼 말라가고 있다

커다란 검정비닐에 담겨 나오던 생활 도구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다
남편에 의해 버려졌다

일가의 옷들은 포대기 터지도록 담겨 축 쳐진 채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오는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간간이 치매 걸린 시아버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을 붙잡고 큰소리로 나를 찾을 뿐이다

종일 흘러가는 길에 둥둥 떠다녔다
캄캄한 시간 속에서 짜놓은 계획 같은 것을 따라가기도 했다

곡선에 숨어 자라난 희귀성 침엽, 세 차례의 반복
만 팔천 번 따라온 고통, 장기 끝에 고인 똥물조차 끌어 올렸다

등 뒤에 바짝 붙어 얕은 잠에 빠진 아이의 숨소리
적막에 적막이 겹친 눈에 일렁이는 파도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꽃, 피는 때 - 박미경


그때,
악을 쓰며 대들 때 아버지는 침묵했다
스물, 소름 돋는 사월이었다

아버지는
홍건네 능금꽃 한창 필 시기인데 말하고
딸은
당신에게 남은 이 세상 더는 고단하지 않았으면 생각하며
아버지 팔을 잡아끌며 걷는다
개옻나무 밀생하며 숲을 이루는 살구목지 지나
먹치골에 아버지 버리러 가는 길
나무하러 다니던 길 지긋지긋하여
눈감고도 단숨에 갈 수 있다던 아버지
큰골말래이까지도 못 가
땅바닥에 앉아 고슬고슬한 쌀밥 달라고 어깃장 놓더니
왜미나리아재비 햇줄기 끝 꽃 피는 것 들여다보며 웃는다
딸은 뒷짐 진 채 살그머니 발길을 옮기며 침묵했다

왜미나리아재비, 잠시 흔들렸다


 

 

# 박미경 시인은 경북 군위 출생으로 2017년 <시에>로 등단했다. 대구경북작가회의, 시에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토란꽃이 쏟아졌다>가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