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여우 - 육근상 시집

육근상 시집은 제목부터 간결하다. 이전부터 그랬다. 이번이 네 번째 시집인데 . , 등 모든 제목이 간결하다. 시집 이름도 한자를 병기하지 않으면 금방 이해가 되지 않을 제목이기도 하다. 요즘 시집 제목이 대체적으로 길고 달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제목 장사를 무시 못할 일도 아니나 일단 설탕과 색소를 듬뿍 넣고 보는 것이다. 코로나로 심신이 지쳤는데 시집이라도 달달하면 좋지 않냐고? 한편 맞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때일수록 노래는 슬프고, 영화는 가슴을 후벼 파고, 시는 시고 떫어서 눈이 뻐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행복한 사람이 많은데 나라도 조금 불행하면 그것도 일종의 역설적 위안 아닐까.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삐딱한 아웃사이더는 어쩔 수 없다. 육근상 시인은 진국 같..

네줄 冊 2021.09.30

당신의 노동은 안녕하신가요? - 김경희

작년 말 한 후배가 직장에서 잘렸다. 표면상으로는 권고 사직이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회사가 워낙 어려워 하나둘 떠나는데 버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반 년 이상 월급을 삭감하면서 버텼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회사 내 분위기가 어차피 짤릴 텐데 알아서 나가라였단다. 근로기준법으로 보면 부당해고에 해당하지만 회사는 그 방식을 취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 후배는 약간의 위로금과 퇴직금을 정산 받을 수 있었다.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회사가 망하면 퇴직금도 받지 못하고 직장을 잃는 경우도 있다. 노동자를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이 있지만 이 법도 어느 정도 큰 회사에 해당되는 법이다. 가령 상시 노동자가 5인 이하라면 연차 휴가는 먼 나라 얘기다. 연차 휴가는커녕 주 5일 근무도 지키지 않는..

네줄 冊 2021.09.26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 박남원 시집

아파트가 주된 주거 형태로 자리하면서 골목과 마당이 사라지고 있다. 가물가물하지만 내 어릴 적 살던 집은 허름한 초가였다. 마당 모퉁이에 장독대가 있고 한 켠에는 늙은 감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누렁이와 장난을 치다 감나무 그늘에서 함께 낮잠을 자기도 했다. 바지랑대를 아는가. 지금이야 세탁기와 건조기를 거치면 편하게 빨래를 하는 시대지만 예전에는 빨래도 노동이었다. 어머니는 빨래터에서 빨아온 옷들을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었다. 물기 머금은 빨래 무게 때문에 빨랫줄이 축 처진다. 이때 빨랫줄 중간쯤에 세워 축 늘어진 줄을 받쳐주는 바지랑대가 필요하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어릴 적 마당에 서 있던 바지랑대가 생각났다. 황폐해진 내 마음을 바지랑대처럼 받쳐준 시집이기 때문이다. 물이 ..

네줄 冊 2021.09.23

아프면 보이는 것들 - 의료인류학연구회

한 달 전부터 올 추석은 아무데도 가지 않고 집에 머물기로 작정했다. 코로나로 꼼짝을 하지 못한 작년 추석과 마찬가지다. 확진자 숫자가 작년보다 훨씬 많은데도 피부로 느끼는 경각심은 되레 느슨해졌다. 걸리고 안 걸리고는 하늘의 뜻이니 대충 살지 웬 호들갑이냐고 할지 모르나 그래도 안 걸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접촉을 줄이는 것이 최상이다. 일찌감치 책을 읽으며 집에 머물기로 결정한 이유다. 이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 목록에서 몇 권의 시집과 단행본이 쏟아져 나온다. 몽땅 주문하고 싶으나 그래도 골라내야 한다. , 오늘 종일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이 연휴에 맞는 편안한 휴식을 본래 내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뺏은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하나 더 먹으면 누군가는 굶어야 하고 내가 하나 더 버리면 누군가의 고통으로 ..

네줄 冊 2021.09.19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 안태현 시집

안태현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2011년에 으로 등단했으니 올해 딱 10년 차다. 2015년에 첫 시집을 내고 세 번째 시집이니 부지런히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시가 느슨하거나 허술한 것 없이 탄탄하고 어려운 낱말 없이도 긴 울림을 준다. 한 사람에 꽂히면 단물이 빠질 때까지 주구장창 만나는 편인데 시인도 마찬가지다. 이 시인에게 제대로 꽂혀 나오는 시집마다 집중해서 읽는다. 발로 쓰든 엉덩이로 쓰든 가슴으로 쓰든 간에 시에는 그 시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사춘기 적 체험을 발견할 수 있다. 연작시로 세 편씩 실린 과 이다. 열 여섯 살에 취업한 영등포 지하다방은 시인의 첫 직장이었다. 바람 한 점, 햇빛 한 점 없는 이곳을 시인은 적멸보궁이라 칭한다. 김 양이나 ..

네줄 冊 2021.09.18

출생의 비밀 - 홍성식 시집

홍성식은 시인보다 기자로 익숙한 이름이다. 내가 오마이뉴스를 초기부터 봐 왔던 터라 그의 기자 활동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는 원래부터 시인이었다. 그가 쓴 기사를 읽으면 문장 속에서 시인 기질 다분한 감성이 느껴진다. 실제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아이디에는 poet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시집 날개에 실린 약력을 살펴 보자. 홍성식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그 경험이 일찌감치 동서 갈등의 그림자를 의식에서 털어내게 했다. 2005년 으로 등단했고, 시집 을 펴냈다. 몇 군데의 신문사를 옮겨 다니며 2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고 있다. 마흔 살이던 2011년 20여 개 나라를 홀로 떠돌며 기억 속에 남을 '에뜨랑제의 삶' 10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약력에서 보듯 홍성..

네줄 冊 2021.09.15

아프게 읽지 못했으니 문맹입니다 - 이은심 시집

예전에 어머니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전원일기였다. 가물가물하지만 전원일기 방영 시간이 화요일 저녁 8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어머니는 노안으로 눈이 침침하다면서도 화요일이면 열일을 제쳐 두고 그 프로를 참 열심히 봤다. 어머니는 최불암과 김혜자가 진짜 부부인 줄 알고 사셨다. 극중 김회장 부인이자 용식 엄니의 이름은 이은심이다. 그 집에 전화기를 놓던 날 모든 식구가 개통 기념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하느라 야단법석이다. 용식 엄니만 전화 걸 데가 없다. 이은심 여사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 이불 속에서 전화기에 대고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돌아가신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당신 딸 은심이 잘 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어머니는 이 장면을 보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내 어머니도 형제가 많지 않아 달랑 ..

네줄 冊 2021.09.12

음식물 쓰레기 전쟁 - 앤드루 스미스

TV에서든 유튜브에서든 먹는 방송은 인기다. 우연히 관련 자료를 찾다 들어간 유튜브 먹방 구독자 숫자가 100만명이 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음식 정보나 상식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특정 메뉴를 조리해 먹는 것뿐인데도 그렇다. 대부분 먹는 것에는 관심이 많아도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는 등한시 한다. 이런 책은 요리책보다 안 팔릴 게 뻔하다. 이 책의 저자 앤드루 스미스는 맛난 음식 잘 먹는 것에 초첨이 아닌 어떻게 하면 음식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학자다. 음식 쓰레기를 안 만들 수는 없다. 수박을 먹으면 껍질이 쓰레기로 나오고 생선을 먹고 나면 뼈와 머리 등이 모두 쓰레기다. 이 책에서는 이런 음식 쓰레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뿐 아니라 생각보다 참 많은 곳에서 음식이 버려..

네줄 冊 2021.09.08

축소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 이보람

흥미롭게 쭉쭉 읽어내려간 책이다. 한 10여 년 전부터이던가. 이런 류의 책을 좋아 한다.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 못하던 미니멀리즘을 실행하면서부터 유독 환경에 관한 책을 찾아 읽게 된다. 매사에 주먹구구식이면서 책 읽기는 비교적 계획적이다. 축소주의자란 말이 명징한 단어이지만 막상 일상에서 써먹으려고 하면 막막할 때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게 축소주의자구나 했다. 읽으면서 배우고 읽고 나서 실천하고 싶어지는 좋은 책이다. 작년 말인가. 올초였던가? 읽고 싶다는 생각에 메모를 해 눴으나 읽을 기회가 없었다. 꼼꼼하게 골라 목록에 올렸어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기회가 오지 않거나 영영 잊혀지는 책이 많았다. 무슨 내용의 책인 줄 알고나면 무턱대고 읽기에 앞서 저자가 궁금하다. 이보람, 이름만 보면 ..

네줄 冊 2021.08.22

서른세 번의 만남, 백석과 동주 - 김응교

백석과 윤동주의 시를 비교하면서 읽을 수 있게 한 책이다. 시인 김응교는 일본 문학에 정통하기도 하지만 시인 윤동주와 김수영 연구가이기도 하다. 시집도 냈지만 시인보다 학자가 더 어울리고 업적도 평론에서 빛난다. 대책 없는 이 활자 중독자는 시인에 관한 글은 놓치지 않고 읽으려 한다. 유독 백석과 김수영에 관한 글은 더 그렇다. 소설 잘 안 읽는 편이지만 김연수 소설 은 백석의 일생을 그린 이야기여서 열심히 읽었다. 백석, 윤동주, 김수영, 서정주를 한국 4대 시인으로 생각한다. 학자들이 정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시를 읽으면서 내 스스로 정한 것이다. 아쉽게도 서정주는 작품보다 살아온 정체성이 나와 맞지 않아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교과서에서는 윤동주와 서정주를 배웠으나 나중 시를 알아 가면서 백석이..

네줄 冊 2021.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