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설명할 수 없는 문장들 - 최규환 시집

읽기 껄끄럽지 않으면서 스펀지에 물 스미듯 조금씩 가슴을 적셔오는 시집이 있다. 이 시집이 그랬다. 두 번째 시집이라는데 나는 처음 만난 시인이다. 1993년에 등단했으니 년식이 다소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시에서 오래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반면에 시집 곳곳에 촘촘하게 새겨진 나이테의 단단함이 제대로 전달된다. 년식은 낡은 것이 아니라 적당히 숙성한 것이다. 시인의 말에 이런 문구를 남겼다. 오랜 기간의 공백이었으나 멀지 않은 날들의 기록이다. 예민하지 못했던 삶에게 값을 치르는 시간이었거나 스스로 익숙해지는 허물이었다. 자신을 설명하는 방법도 여럿이나 시인의 말은 이렇게 쓸 일이다. 가족에게 고맙다거나 아내에게 바친다거나 하는 일기장 메모 같은 시인의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첫장에 실린 시인의 ..

네줄 冊 2021.12.23

질문 빈곤 사회 - 강남순

묵직한 주제를 아주 명료하게 쓴 책이다. 이런 책을 읽으면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한다.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책이기도 하지만 나와 생각이 같은 저자와 공감대를 이룰 수 있는 것이 더 큰 수확이다. 저자 강남순은 현재 미국 텍사스 크리스천 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다. 2017년 경향신문 선정 올해의 저자로 선정되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한겨레와 경향신문 열독자여서 경향신문에 언급되는 저자를 신뢰한다. 맹목적은 아니다. 강남순은 페미니즘과 종교에 관한 책을 여럿 썼다. 좋은 책을 많이 썼음에도 그의 책은 처음 읽는다. 어느 한 꼭지도 버릴 게 없을 만큼 영양가 있는 책이댜. 일독해서 얻을 게 많은 가성비 갑이랄까. *문제는 거짓과 증오에 중독성이 있다는 점이다. 진실과 사실을 거짓과 선동적 ..

네줄 冊 2021.12.17

성스러운 한 끼 - 박경은

며칠 전부터 올 한 해 읽으려고 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쌓인 책을 정리했다. 매일 매일이 새날이고 기념일이라 여기면서 살지만 한 장 남은 달력은 늘 마음을 경건하게 한다. 대책 없이 책 욕심만 있어 사들이는 습관은 어쩔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면서 옷이나 신발 등 꼭 필요한 물건 외에는 사지 않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있는 것은 버리고 가능한 사지 않는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올해 못 읽은 책은 내년에도 못 읽기는 마찬가지다. 자꾸 읽고 싶은 신간이 쏟아지는데 밀쳐둔 묵은 책에 손이 가겠는가. 미니멀리즘 실천의 제 1의 덕목은 을 믿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는 필요하겠지, 읽겠지, 입겠지, 쓰겠지를 과감하게 잘라내면 실천할 수 있다. 가능한 사지 않고 나중 도서관 이용해야지 했다가 ..

네줄 冊 2021.12.12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 정은정

지금 시대와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이 책 제목이 아니라도 처럼 다정하면서 한편 예리하게 박히는 문구가 있을까. 이 상투적인 제목을 단 책 속에 우리 사회의 여러 단면이 깊이 있게 담겼다. 그동안 신문에 쓴 칼럼을 모아 손질해 한 권으로 엮었다. 그래서 글 꼭지가 길지 않아 틈틈히 읽기에 좋은 책이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모습이 사라졌다. 스마트폰이 신체의 일부가 된 세상이라 책 읽는 사람을 보면 되레 낯설다. 이 책은 어느 대목을 읽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짧지만 강열한 인상을 주는 글이라 지하철에서 읽기에 딱이다. 달달하면서 짧은 글은 SNS에 넘쳐난다. 그런 문장일수록 금방 휘발이 되는 반면 종이 책에서 읽은 문장은 오래 남는다. 한 문장 소개하자면 이라는 꼭지에 이런 글이 있다. 출장을 다니..

네줄 冊 2021.12.02

나는 죽음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 강봉희

서점에 진열된 수많은 책들을 보면 과연 이 많은 책을 누가 읽을까 싶다. 어차피 나는 책 읽기에 게으른 사람이니 해당은 안 될 테고 단군 이래 최대 출판 불황에서도 이렇게 많은 책이 출간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작은 크기의 책인데도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이다. 저자의 이력을 보고 바로 구매한다. 이런 책을 만날 때 나는 망설임이 없다. 전문 글쟁이가 아니기에 문장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건 아니다. 오직 죽은 사람에 대한 깊은 존중이 마음에 와 닿기에 어떤 소설보다 더 흡인력 있게 술술 읽힌다. 저자 강봉희 선생의 이력을 보자. 1953년생인 저자는 1996년 40대 중반에 암에 걸렸다. 병원에서 석 달 시한부 판정을 받았으나 극적으로 살아났다. 선생은 병실에서 다짐했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나간다면 아무에..

네줄 冊 2021.11.22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 김용태 시집

요 근래 우연히 선택한 시집에 풍덩 빠졌다. 제목은 다소 낯설고 어렵지만 좋은 시로 가득하다. 갈수록 시가 자극적이거나 달달해져서 겉만 화려하고 내용물이 부실한 시집이 많은데 이 시집은 낯선 포장지에 비해 내용물이 영양가 만점이다. 이름 없는 시인의 첫 시집이 깊은 울림을 준다. 누굴까. 하늘의 별만큼 많기도 한 시인 중에 김용태라는 사람은 이 시집으로 처음 듣는다. 내가 시를 열심히 읽는 편이지만 시인들 만큼 정보가 있겠는가. 문예지를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것도 아니고 시를 써 본 적 없기에 지인들과 시에 관한 대화는 더욱 없다.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틈틈히 시집 코너에서 까다롭게 고른 시집이다. 그게 내가 시인을 알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다. 파란만장은 아니어도 파란백장은 겪었기 때문일까. 나도 이제 연..

네줄 冊 2021.11.18

부동산, 누구에게나 공평한 불행 - 마강래

올 한해는 부동산 문제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언제나 사람 사는 시대에서 의식주가 중요하다. 희한하게 진보 정권만 들어서면 부동산이 폭등한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집값을 잡는 것을 최대 과제로 삼았지만 시장은 비웃기라도 하듯 백약이 무효였다. 내년 대선에서 가장 큰 이슈도 부동산 문제다. 부동산이라 하지만 그 말은 곧 집값이다. 집값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이 주목을 받을 것이다. 한국은 전 국민이 축구 감독이고 정치 평론가다. 축구 국가 대항전을 텔레비전 중계로 보며 모두 국대 감독이 된다. 저 새끼는 왜 뽑았냐는 둥, 이쪽으로 패스해야지 생각이 없다는 둥, 현재 감독이 아예 전술도 없고 주먹구구식이라는 둥, 집값 문제도 전문가가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문제다. 마강래 선생은 오랜 기간..

네줄 冊 2021.11.15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정명원

읽고 나서 마음이 아주 따뜻해지는 책이다. 스스로 외곽주의자라 말하는 현직 검사가 쓴 책이다. 요즘 유독 검사라는 직종에 대해 비호감을 갖고 있던 차에 이 책이 검사에 대한 비호감 정서를 조금 정화시켰다 할까. 애초에 검사에 대해 좋은 인상이 아닌데 요즘 고발사주로 수사 대상이 된 김웅 의원을 보자. 검사 출신의 보수당 국회의원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이 사건으로 극강 비호감이 되었다. 예전에 그의 책 을 읽을 때만 해도 비교적 호감이었다. 김웅이 검사 옷을 벗고 보수당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의 보수당 사람과는 다를 줄 알았다. 얼마 전 식당에서 친구와 밥을 먹는데 TV 뉴스에 김웅 의원이 나와 고발사주 사건 해명을 했다. 밥 먹던 친구 왈 "..

네줄 冊 2021.11.12

라면의 재발견 - 김정현, 한종수

라면을 좋아한다. 짜장면 곱배기를 후딱 해치울 정도로 10대는 물론 식탐이 심했던 20대까지만 해도 라면 두 봉지를 후딱 해치웠다. 지금은 소식을 하는 탓에 한 봉지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아무것도 넣지 않고 라면만 끓이면 한 봉지가 딱이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첨가물이 많다. 양배추, 양파, 멸치, 미역 등 몇 가지와 두부도 조금 넣어야 하고 불린 표고버섯 하나 아니면 양송이 두어 개 썰어 넣고 거기에 달걀까지 넣으면 웬만한 중국집 짬뽕 양이다. 내가 오뚜기 스넥면을 즐겨 먹는 이유도 면이 조금 적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은 아니어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라면을 먹는다. 희한하게도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라면이다. 많이 먹으면 해롭다고도 하나 라면은 내가 가장 자주 먹는 영혼 음식이다. ..

네줄 冊 2021.11.09

베두인의 물방울 - 우대식 시집

예전에 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을 읽고 저자인 우대식 시인을 알았다. 한때는 기형도의 시를 달달 외울 정도로 밤을 새며 읽었다. 대부분 골백 번씩 읽었을 것이다. 여림 시인도 마찬가지다, 그의 유고 시집을 오랜 기간 옆에 두고 읽었다. 이연주와 신기섭 시인도 자주 들추는 시집이었다. 우대식은 12명의 요절 시인을 그만의 맛깔스런 문장으로 애도했다. 마음에 담고 있던 시인을 다시 소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우대식 시집을 찾아 읽었다. 생각보다 시집이 많지 않았다. 그가 낸 세 권의 시집 중 과 두 권을 읽었다. 시에 공감이 가면 시인의 약력이 궁금해지는 법, 그때 시인은 평택의 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번에 나온 은 오랜 만에 나온 그의 네 번째 시집이다. 1..

네줄 冊 2021.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