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 안태현 시집

마루안 2021. 9. 18. 19:50

 

 

 

안태현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2011년에 <시안>으로 등단했으니 올해 딱 10년 차다. 2015년에 첫 시집을 내고 세 번째 시집이니 부지런히 시를 쓰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시가 느슨하거나 허술한 것 없이 탄탄하고 어려운 낱말 없이도 긴 울림을 준다.

 

한 사람에 꽂히면 단물이 빠질 때까지 주구장창 만나는 편인데 시인도 마찬가지다. 이 시인에게 제대로 꽂혀 나오는 시집마다 집중해서 읽는다. 발로 쓰든 엉덩이로 쓰든 가슴으로 쓰든 간에 시에는 그 시인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의 사춘기 적 체험을 발견할 수 있다. 연작시로 세 편씩 실린 <석굴암 지하다방>과 <구로공단>이다. 열 여섯 살에 취업한 영등포 지하다방은 시인의 첫 직장이었다. 바람 한 점, 햇빛 한 점 없는 이곳을 시인은 적멸보궁이라 칭한다.

 

김 양이나 미스 박으로 불리던 레지들은 그를 안 군이라 불렀다.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음모가 무성해지고 성대가 굵어진 안 군은 불상 없는 그 석굴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홑어머니의 음성을 들으며 시인의 토대를 다졌으리라.

 

첫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에서 그는 詩가 상처 속에서 피는 꽃이라고 했다. 이 시인은 그 상처를 잘 다듬어서 맑은 향기 가득 품은 시로 표현하고 있다. 이 사람의 시에는 유독 성실함이 느껴지는 시가 많다. 독하지 못한 이 시인의 천성이리라.

 

내가 시집 평가할 능력이 없기에 전문가의 문장을 빌려온다. 이 시집을 해설한 문학평론가 김윤정은 안태현의 시를 <삶의 균형 잡기를 위한 추(錘)의 언어>라고 했다. 웬만해서 비평가 말 믿지 않는데 이 문장엔 설득이 된다. 

 

*안태현 시인에게 시는 삶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핀이자 삶의 궁극적 목적이기도 하다. 삶의 굽이굽이에 스며 있는 것이자 삶의 소용돌이 밖으로 돌아나가는 것이기도 하는 시는 삶의 내부에 존재하면서 외부로 작동하는 특수한 장치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는 생활 속에 있는 섬이자 생활 밖에 놓이는 섬이다. *김윤정 문학평론가

 

전문가의 이 어려운 문장을 해석하자면 안태현 시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고름은 안에서 만들어졌지만 굳은살은 밖에서 생긴 것이다. 나의 시 읽기는 이렇게 꼴리는 대로 읽고 내 방식으로 해석한다.

 

시는 시인이 썼지만 소비자는 독자다. 어쨌든 한동안 이 시집은 자주 펼쳐보게 될 듯하다. 시인의 정체성과 들꽃 같은 맑은 심성을 느낄 수 있는 시가 시집 맨 마지막에 실렸다. 눈과 입에 붙이자마자 가슴에 스미는 시를 구독료 지불하듯 옮긴다.

 

 

피아노가 된 여행자 - 안태현

 

 

바람은 연두 위에 머물고 못생긴 후회 하나 앞세워 이 산에서 저 산으로 휘돌아가다 홀연히 들꽃 자생지를 만날 때

 

과수원을 지나다가 굵은 피자두 몇 알 주워 달게 먹은 일을 두고 다친 것들과 나와의 인연에 대해 말할 때

 

감나무 잎 지고 무너진 돌담 너머 햇빛이 짱짱한 툇마루 아래 늘어진 개의 검은 젖꼭지가 고른 숨에 얹혀 실룩일 때

 

따뜻한 구들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면 어둠이 뚫어 놓은 알밤 크기의 구멍 속에서 나른함이 물구나무로 걸어 나올 때

 

아, 눈이 오나 봐 바닷가에 퍼붓는 눈보라를 헤쳐나가다가 반쪽이 된 당신과 반쪽이 된 내가 서로 맞대어 눈사람이 될 때

 

노을에 설핏 비치는 그 무렵의 뺨이라는 말보다 당신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게 된 건 아마 그 이후였을 것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