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출생의 비밀 - 홍성식 시집

마루안 2021. 9. 15. 21:52

 

 

 

홍성식은 시인보다 기자로 익숙한 이름이다. 내가 오마이뉴스를 초기부터 봐 왔던 터라 그의 기자 활동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는 원래부터 시인이었다. 그가 쓴 기사를 읽으면 문장 속에서 시인 기질 다분한 감성이 느껴진다.

 

실제 오마이뉴스 홍성식 기자 아이디에는 poet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다. 시집 날개에 실린 약력을 살펴 보자. 홍성식 시인은 부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냈다. 그 경험이 일찌감치 동서 갈등의 그림자를 의식에서 털어내게 했다.

 

2005년 <시경>으로 등단했고, 시집 <아버지꽃>을 펴냈다. 몇 군데의 신문사를 옮겨 다니며 2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고 있다. 마흔 살이던 2011년 20여 개 나라를 홀로 떠돌며 기억 속에 남을 '에뜨랑제의 삶' 10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약력에서 보듯 홍성식의 시에는 유목민의 피가 흐른다. 낯선 것이 익숙한 체질이랄까. 나는 외국어인 에뜨랑제보다 비슷한 의미의 나그네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어휘지만 학창 시절 목월의 시를 외우며 나도 나그네로 살고 싶었다.

 

첫 시집인 아버지꽃이 조금 날것처럼 느껴졌다면 두 번째 시집은 많이 다듬어져서 매끄럽게 읽힌다. 여전히 특유의 거친 문장이지만 그것 때문에 더욱 몰입감이 생긴다. 이번 시집으로 홍성식은 온전히 시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 듯하다.

 

 

길 위의 방 - 홍성식

소진한 기력으론 신(神)을 만나지 못한다
황무지에 달이 뜨면
갸르릉 도둑고양이 울고
집 나간 누이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은 밥상에 마주 앉은 데드마스크들
시간은 석고처럼 창백하게 굳고
조롱의 숟가락질, 싸늘한 만찬이 끝나면
표정 없이 젖은 침대에 드는 사람들

어쨌거나 창 너머 달은 또 뜨는데
째각대는 시계 소리에 맞춰 계단을 올라
어둡고 축축한 방, 문을 열면
나신의 엄마
그녀로부터 시작하는 하얀 비포장길
꿈에서도 달맞이꽃은 흐드러졌는데
길을 잃은 자, 길 위에는 방이 없다.

 

 

눈에 들어오는 좋은 시가 여럿인데도 오늘은 이 시를 대표시로 고른다. 거친 듯하면서 염세적인 섬세함이 돋보인다고 할까. 아무도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왜 이 시인에게서 염세적인 섬세함을 느꼈을까. 분명 선무당이었겠지만 아마도 나는 전생에 작두를 타는 박수무당이었지 싶다. 

 

내 능력 밖의 알량한 비평 대신 이 시집을 읽고 든 내 감정을 정리해주는 문장이 있어 옮긴다. 시집 뒷표지에 내가 좋아하는 두 시인의 추천사가 쫄깃쫄깃한 명문이다. 시집 읽은 황홀함에 불을 지르는 문구다.

 

*이 시집을 열면 벼랑 끝에 홀로 남은 장수의 긴 칼날 위로 흐르는 피가 보인다. 요즘의 소심한 사무원 같은 시에 익숙한 독자들은 홍 시인의 장대한 호흡에 숨이 가쁠 것이다. 특히 수작들의 성전인 2부 <출생의 비밀>은 대하장강 같은 서사시를 압축한 백미 중의 백미다. 이 시집에는 홍성식 시인이 그 ‘누구에게도 발설치 못한 아득한 진실’이 숨어 있다. 하늘이 이미 그를 용서한 진실이다. 용서하지 않아도 ‘구포시장 좌판의 빨간 자두’ 하나에 내 가슴은 이미 무너졌다. 그런데 시집을 닫을 때까지도 홍 시인은 끝내 칼의 피를 닦지 않는다. *이산하 시인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자기 생을 저주하는 자가 있다. 포구의 좌판에서, 소도시 뒷골목에서, 이국의 여행지에서 힘겹게 삶을 꿰매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거친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 홍성식이다. 그는 가여운 자들을 위해, 그들의 낮은 목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마이크를 든 자멸의 가수다. 그의 노래 앞에서 생은 이다지고 가엽고, 이다지도 뜨겁다. 느끼하고 환희로운 생을 살았던 자, 이 시집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허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