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식사에 대한 생각 - 비 윌슨

괜찮은 책 한 권을 읽었다. 내가 말하는 괜찮은 책은 내용, 가격, 책모양(디자인) 등 세 박자가 맞는 책이다. 이 책이 딱 그렇다. 내용은 음식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내 입으로 어떤 음식을 집어 넣을 것인가에 대한 세밀한 제안이다. 책값은 500 쪽이 넘는 비교적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17,800 원이다. 디자인 또한 호화스럽지 않으면서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종이 책 안 팔린다는 불황이 무색하게 쏟아져 나오는 작금의 출판계에서 이런 책은 귀하고 신선하다. 제목처럼 먹는 이야기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다. 유튜브에도 피디수첩 같은 시사 프로보다 먹방이 월등히 구독자 숫자가 많을 걸 봐도 알 수 있다. 어디가면 뭐가 맛있다는 내용이면 책이 확 팔릴 텐데 이 책은 많이 팔리지는 않을 것이다. 여성 ..

네줄 冊 2020.04.18

꿈꾸는 중심 - 황원교 시집

이 시집은 손으로 쓴 시가 아니라 입으로 쓴 시를 묶은 책이다. 입으로 썼다니까 시낭송을 녹음한 낭송 시집처럼 들리는데 황원교는 사지마비 장애인이다. 그는 입에 나무 젓가락을 물듯 컴퓨터 마우스 스틱을 물고 한 자 한 자 시를 쓴다. 시인을 안 것은 몇 년 전 이라는 시집을 읽고서다. 장애인이 된 후로 한 번도 땅을 딛지 않은 신발을 가슴 시리게 표현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절실하게 사는 이유가 있겠지만 시인은 시가 세상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시에 대한 이야기에 앞서 시인이 살아온 인생 역정을 알아 보자. 1959년 춘천 출생인 시인은 강원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고 ROTC 포병장교로 복무했다. 착실하게 직장 생활을 하던 1989년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딱 서른 살이었다. 결혼을 1주일 앞두고 혼사 문..

네줄 冊 2020.04.14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 정덕재 시집

출판업에 일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간 동향 중에서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출판사가 바로 이다. 개성 시대라서인지 특이한 이름을 가진 출판사가 많다. 시집 전문 대형출판사 못지 않게 걷는사람이 좋은 시집을 많이 내고 있다. 호시탐탐 읽을 만한 시집 없나 엿보다 새로운 시집을 만나면 설렌다. 이 시집은 제목부터 강렬했다. 그럴 듯한 제목으로 독자를 현혹하는 책이 많기에 제목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집은 제목으로도 내용물로도 독자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 시집이 네 번째 책이지만 정덕재 시인은 별로 안 알려진 작가다. 나도 첫 번째 시집 빼고는 읽지 못했다. 이전의 시에서 크게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연속극 보다가 다음 편이 궁금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을 제대로 읽..

네줄 冊 2020.04.10

국호로 보는 분단의 역사 - 강응천

내 이름에 심한 컴플렉스가 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항렬에 따라 갖다 붙이다 보니 발음과 표기가 따로 논다. 내 이름을 전화로 불러주면 거의 100% 틀린다. 한 자씩 떼서 반복해서 불러줘야 한다. 내가 원하지도 않은 이름을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게 힘들어서 개명까지 생각했지만 이것도 내 운명이겠거니 하고 살기로 했다. 헌법에도 나오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지독한 반공 세대라서 북한의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한참 후에 알았다. 무찌르자 공산당, 북한 괴뢰, 간첩 신고, 때려잡자 김일성 등 무지막지한 구호 속에서 자랐다. 죽음을 불사한 선배들이 피와 눈물로 일군 민주화 덕분에 이런 책도 읽게 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던가. 가끔 완전히 개방된 ..

네줄 冊 2020.04.08

눈과 도끼 - 정병근 시집

예전에 조용필 신곡을 손꼽아 기다린 시절이 있었다. 노래가 나오자마자 레코드 가게로 달려가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반복해서 그의 노래를 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진다는 말을 요즘은 쓰지 않지만 카세트 테잎으로 노래를 들었던 사람은 이 말을 안다. 정병근 시인이 10년 만에 시집을 냈다. 실로 오랜 만이다. 조용필까지는 아니어도 언제쯤 시집이 나오려나 기다렸던 시인이다. 이따금 뉴스를 검색하며 출판 동향란에 행여 그의 시집 소식이 있으려나 찾아 보기도 했다. 잊혀질 만하니 시집 소식이 들렸다. 사랑도 오래 떠나 있으면 마음에서 멀어지기 십상이듯 시인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꾸준한 작품 발표와 시집 내기가 중요하다. 1962년 출생인 시인은 이제 겨우(?) 네 번째 시집을 냈다. 시인도 나이를 먹어서일까. 이번 ..

네줄 冊 2020.04.06

내가 화가다 - 정일영

책 제목도 인상적이지만 젊은 여성이 빤히 바라보는 그림에 끌려 고른 책이다. 나의 영화 고르는 기준이 배우보다 감독이 먼저고 책을 고르는 기준은 유명 작가보다 내용물이 알찬 책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안 보고 책을 고를 수는 없다. 책 소식을 꾸준히 접하고 있는 내게도 정일영 작가는 완전 무명이다. 책 날개에 실린 저자 소개도 베일에 싸서 실려 있어 작가를 검증하기가 더욱 애매했다. 천상 내용물을 보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몇 장 들추고는 바로 선택했다. 책 판형은 작지만 안에 들어있는 그림은 호기심 가는 작품들이 수두룩했다. 요즘 유독 회자되는 여성주의를 다룬 영양가 있는 내용물로 꽉 찬 야무진 책이다. 화가와 시인은 다른 분야에 비해 여성이 많은 편이다. 주변에도 내가 시 읽기와 그림 감상을 좋아한다..

네줄 冊 2020.04.03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 - 윤의섭 시집

윤의섭 시인을 알게 된 건 언제였을까. 아마도 네 번째 시집인 였지 싶다. 싶지라고 하는 것은 이 시인을 뒤늦게 알았고 그 시집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정서가 나와 너무 닮았다는 소름에 일부러 멀리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 때문이다. 또 나의 시 읽는 방식이 체계적이지 않고 중구난방인 것도 한 이유다. 어쨌든 가능한 멀어지려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저곳에 필사해 옮겨 논 그의 시가 꽤 되는 걸 보면 윤의섭 시에 대한 끌림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저수지에 빠져 죽은 내 친구 몽연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시들이 가슴을 시리게 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시를 읽지 않았다. 읽지 않았다기보다 아껴두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누군가 슬픔도 아껴 먹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래 전에 발표한 그의 시..

네줄 冊 2020.03.30

음식 경제사 - 권은중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인간에게 음식이 차지하는 비중이야 말해 뭐할까.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음식 때문이다. 책을 읽다 보면 저절로 세계사 공부가 된다. 내가 오랜 외국 생활을 한 탓에 음식에 대한 생각이 각별해서 더욱 몰입감 있게 읽었다. 이런 책을 접할 때면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이 책을 쓴 권은중은 누구일까. 날개에 자세하게 실린 약력에다 조금 더 보태면 한겨레신문 기자 출신이다. 50대에 접어 들어 기자 생활을 그만 두고 이탈리아 요리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기자 출신이어서일까. 문장이 아주 단촐하면서 명료하다. 쌀, 밀, 옥수수, 보리, 인류의 생명을 유지해준 4대 곡식의 유래는 대충 알고 있었으나 이 책에서 더욱 확실해졌다. 지금이야 남아 도는 식량이지만 쌀이야 말로 얼마나 귀중한..

네줄 冊 2020.03.20

소심한 사진의 쓸모 - 정기훈

이런 책은 무조건 읽는다. 까다로운 책 고르기에서 이렇게 따뜻한 책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다. 스마트폰 시대여서일까. 세상엔 사진이 넘쳐난다. 이미지 과잉 시대다. 사회관계망 서비스에도 사진 없이 소통할 수 없을 정도다. 책도 사진도 넘쳐나는 시대에 과연 진지함을 담고 있는 것이 몇 개나 있을까. 왜 모든 것이 진지해야만 하냐는 반문을 할 수 있다. 맞다. 모든 것이 진지할 필요는 없다. 책도 영화도 만화도 심심풀이로 소비하기도 한다. 심심할 시간이 없는 나는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모범생은 아니지만 막 살고 싶지 않은 몸부림이다. 그동안 막 살면서 인생을 낭비했기에 더욱 그렇다. , 참 저렴하게 살았던 소심한 나도 쓸모가 있을까. 이 책의 저자 정기훈은 어쩌다 카메라를 잡았다가 사진 찍는 일..

네줄 冊 2020.03.16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 - 이진경

이 책을 읽고서 김시종이란 시인을 다시 보게 되었지만 저자인 이진경 선생도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일전에 그의 책을 읽기는 했어도 큰 관심은 없었다. 저술 활동에 열심이고 늘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였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그리고 교수, 거기다 꽤 많은 책을 냈다. 매년 두어 권을 낼 정도로 왕성하다. 그의 책을 다 읽어보진 않았으나 호기심 가는 책이 여러 권이다. 책 읽기에 게으른 사람이라 어쩌면 다른 책은 입맛만 다시다 지나갈 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사회학자에게 시인이 눈에 띄었을까. 일본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문학 평론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내가 이진경 선생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예전에 김시종 시집을 읽고 나서다. 시집 의 번역자가 이진경이다. 김시종 선생의 시도 좋았지만 어떻게 이..

네줄 冊 2020.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