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425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 황학주 시집

황학주 시집은 늘 떨림을 준다. 이 시집은 그의 11 번째 시집이다. 그의 대부분의 시집을 다 읽었다. 대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몇 권의 시선집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첫 시집 에서부터 그의 시는 나와 코드가 맞았다. 기형도 시인의 유고집이 나온 무렵인가 보다. 그때까지 내가 읽은 시의 영역은 교과서에 나온 윤동주, 김소월, 서정주 정도였다. 조금 더 들어가도 서정윤과 박노해 시 정도였다. 당시에는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형도 시인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유고집이 나오면서 그의 죽음도 뒤늦게 알았다. 그때부터 시에 대한 호기심은 바이러스 퍼지듯 하나씩 늘어났다. 그때 보신각 근처에 있었던 종로서적은 나의 안식처였다. 시보다 사회과학 책에 관심이 많았다. 보고 싶은 책을 맘껏 사지 ..

네줄 冊 2019.09.05

혼자 남은 밤, 당신 곁의 책 - 표정훈

흔히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있다. 이 책의 저자가 그렇다. 유유상종이라고 나같은 염세주의자는 끼리끼리 논다. 그렇다고 헤프게 나를 노출시키지 않는다. 창녀 주제에 지조 있는 척 한다고 할까. 나는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는 창녀 같은 활자 소비자다. 내 맘대로 결론이다. 이 책은 표지부터 인상적이다. 내가 자다가도 일어나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 빨려 들어가듯 책을 집었다. 이 책이 나를 선택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호텔 로비에서 애인을 기다리며 책을 읽는 것 같지만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8년에 그려졌다. 미국 뉴욕에서 버먼트주 벌린텅 행 열차 안에서 잡지를 읽고 있다. 저자는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이 여인의 심리 상태와 읽고 있는 잡지 이름과 내력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

네줄 冊 2019.09.01

하루를 더 살기로 했다 - 이수호

이 책은 평균적인 책 크기에 비해 다소 작고 무게도 가볍다. 그러나 내용은 아주 묵직하고 울림이 있다.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썼다.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에세이다. 일기장 형식의 이런저런 소소한 일상도 있고 울분에 젖은 詩도 있다. 책을 읽으면 당신의 이력서가 그대로 나온다. 전태일과 같은 해인 1948년에 태어나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원래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국문과 야간과정을 마치고 중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전교조 활동으로 학교에서 해직되고 감옥에도 갔다. 그의 이력에 전교조 위원장과 민주노총 위원장이라는 직함이 붙는다. 수배를 당해 숨어 살기도 했고 감옥에서 무상 급식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열정은 끝이 없었다. 모두 이..

네줄 冊 2019.08.23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 정영목

예전에 어떤 외국 영화에서 본 장면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멀리 돈벌러 떠난 남편에게 온 편지를 받았다. 문맹자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고 편지 내용을 엉뚱하게 말하는 장면을 보며 관객들은 웃었다. 나도 씁쓸하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은 번역가 정영목의 에세이다. 그동안 자신이 번역한 책들을 돌아보며 기억에 남은 작가들의 작품을 회상하고 있다. 이 책을 읽다가 오래전에 본 영화가 떠오른 것은 외국어로 된 작품이 번역가의 손을 거치면서 혹 왜곡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독자도 원서를 접할 수 있는 이 개명한 세상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외국 작가의 의도를 번역이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동안 정영목 선생이 번역한 책은 몇 권 읽지 못했다. 내가..

네줄 冊 2019.08.19

김원봉 평전 - 김삼웅

휴가철이라 거리가 한산하다. 매일 자동차와 실랑이 벌이면서 사람에 부대끼던 중이렇게 헐렁해진 서울 거리가 좋다. 한동네에 사는 친구가 여름 휴가를 가면서 기르는 강아지를 부탁했다. 애견 호텔에 맡기고 싶은데 작년에 안 좋은 경험이 있어 싫단다. 기꺼이 내가 맡기로 하고 아예 며칠 친구 집으로 출퇴근을 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이 기회에 밀린 책이나 실컷 읽어야지였다. 그중의 하나가 김원봉 평전이다. 읽으려고 했던 책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순서가 밀린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애초에 읽을 책 목록에 없던 책이다. 올해 이 사람처럼 논란의 대상이 된 인물이 있을까. 김원봉 선생은 걸어온 길에 비해 크게 주목 받지 못한 인물이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기념사에서 선생을 언급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내가 ..

네줄 冊 2019.08.16

70세 사망법안, 가결 - 가키야 미우

웬만해서 소설을 읽지 않는 내가 호기심이 가는 독특한 제목 때문에 아주 진지하게 읽었다. 이 소설은 빼어난 문학적 문장보다는 내용에 있다. 메시지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공감이 간다. 그렇다고 세태를 신랄하게 꼬집는 사회성이 짙은 것도 아니다. 노령화가 심각한 일본이다. 모든 사람은 70세가 되면 죽어야 하는 법이 통과 되어 2년 후에 실행된다. 그러니까 현재 68세인 사람도 88세인 사람도 남은 생애는 2년뿐이다. 신문이고 TV이고 이 법의 실행을 두고 찬반 논란이 한창이다. 질병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빼고 대부분의 노인들은 반대다. 반면 대다수 젊은이는 찬성이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극명하게 입장이 갈린다. 당연하다. 어서 죽어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노인네를 3대 거짓말쟁이라..

네줄 冊 2019.08.16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 구정은

지난 봄 여행길에서 본 일이다. 막 해가 넘어가는 어느 바닷가 포구에 앉아 있었다. 몇 척의 고깃배를 빼고는 대부분 낚시배들이 잔잔하게 찰랑거리는 포구다. 한쪽에서 다섯 명의 중년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저녁을 먹고 있었다. 복장을 보니 아마도 밤낚시를 온 모양이었다. 출항할 낚싯배를 기다리며 미리 요기를 하는 중이다. 뒷자리를 정리하고 각종 쓰레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든 한 사람이 두리번거리며 "버릴 곳이 없네" 하니 다른 사람이 말했다. "전부 배에다 실어, 바다에 나가서 버리면 되잖아" 했다. 그러자 바로 "굿 아이디어"라며 맞장구를 친다. 잠시 후 배 주인이 나타나서 그들을 싣고 떠나는 것을 봤다. 바닷가 주민들도 처리 곤란한 쓰레기를 바다에 나갈 때 가지고 가서 버린다는 얘길 들었는데 낚시꾼들까지..

네줄 冊 2019.08.09

운명이다 - 노무현 자서전

예전에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었다. 노무현 10주기에 맞춰 나온 전집을 전부 읽었으나 역시 이 책이 제일 감동적이다. 읽어야 할 책들이 밀려 있는 마당에 읽은 책을 다시 읽기가 쉽지 않다. 책이든 영화든 많이 보기보다 좋은 작품을 두 번 읽는 게 낫다. 어머니 돌아 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던 내가 노 대통령 서거 소식을 듣고는 펑펑 울었다. 지금은 안정이 되었지만 당시는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오랜 기간 떠나지 않았다. 노사모처럼 열성 지지자는 아니었어도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가는 날짜를 딱 정해 놓은 것은 아니지만 가끔 봉하 마을에 간다. 묘역을 한 바퀴 돌고 봉화산에 올라가 들판을 내려다 보면 정말 아까운 사람 잃었다는 짠한 감정이 울컥 올라온다. 슬픔은 이미 정리 되었지만 한..

네줄 冊 2019.08.03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김관욱

요즘 아픔을 치유하고 공감하기 위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마도 위로 받고 싶은 사람이 많기 때문인지 이런 책이 그런대로 팔리는 모양이다. 이 책은 다소 상투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홍성수의 이후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이다. 겉보다 속을 까다롭게 고르기에 일단 내용물이 좋으면 닥치고 읽게 된다. 하긴 인물과사상이 내용물이 알찬 책을 출판하는 곳이기도 하다. 어쨌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약 팔기 위한 필자가 아닌 이픔을 공유하려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가족, 낙인, 재난, 노동, 중독 등 아픔을 다섯으로 분류했다. 그중 낙인의 아픔과 노동의 아픔이 인상적이다. 장애를 보는 비열한 시선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낙인의 장은 강서구 장애인 특수학교의 설립 과정을 적나라하게 알려준다. 예..

네줄 冊 2019.07.27

그 이름 안티고네 - 유종호

한국 문단에는 이름이 헷갈리는 평론가 두 사람이 있다. 유종호와 유성호다. 세상엔 동명이인도 부지기수지만 비슷한 이름이 하필 좁은 평론계여서 더욱 그렇다. 이 책도 저자가 헷갈렸다. 그렇다고 게으른 내가 두 사람의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다. 이 책은 팔순을 훨씬 넘긴 유종호 선생의 산문집이다. 라는 시론집에 이어 연달아 읽었다. 어떤 책으로 후기를 남길까 하다 그래도 이 책이 조금 더 인상적이다. 80년 넘는 한 사람의 인생이 딱 초가을의 맨드라미 빛깔이다. 누구의 인생인들 곡절이 없겠느냐만 그런대로 겸손하게 나이 먹은 한 지식인의 아름다운 인생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이런 책을 읽으면 나는 공연한 트집을 잡고 싶다. 문맹율이 90%에 가까웠던 당시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행운을 잘 모른다는 것..

네줄 冊 2019.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