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당신은 첫눈입니까 - 이규리 시집

마루안 2021. 4. 6. 21:51

 

 

 

코로나라는 난데 없는 바이러스 때문에 작년 봄을 잃어 버렸다. 지금 들으면 까마득한 옛날처럼 들리지만 작년 봄에는 마스크를 살 수 없었다. 믿기지 않지만 마스크를 사려는 긴 줄이 판매소마다 펼쳐졌다. 사고 싶어도 날짜가 맞지 않으면 사지 못했다. 날짜뿐 아니라 신분증이 있어야만 마스크를 살 수 있었다.

 

마스크 대란 속에서 내년 봄은 온전히 맞을 수 있겠지 기대했다. 미처 꽃구경 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 작년 봄에 이어 올 봄도 잃어 버렸다. 봄이 일찍 왔다. 꽃도 일찍 피었다. 다른 때 같으면 이제 막 봉오리를 내밀 꽃들이 올해는 이미 지고 없다.

 

어떻게든 적응하며 살기 마련이라 익숙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많은 게 엉망진창이다. 이런 일상에서 그나마 책이 있어 위로를 받는다. 특히 올 봄에 좋은 시집을 많이 만났다. 문학동네 시집도 그 중 하나다. 천하의 문학동네 시집도 모두 공감이 가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 읽기가 유독 호불호가 명확해서 더 그럴 것이다. 심지어 출판사나 미디어의 서평을 참고해 기대하고 주문한 시집에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래 봤자 몇 분의 시간과 만 원 남짓 금전 손실뿐이다. 그래도 나중 그냥 지나쳐도 아쉽지 않을 시집을 걸러 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때론 실패나 손해를 본 후에 깨우치는 인생 꿀팁이 있지 않던가. 나는 화려한 주류(인싸) 무대보다 실패와 절망과 낙담에서 더 많은 인생을 배웠다. 여전히 미숙하지만 앞으로도 비주류(아싸) 삶에서 인생을 즐길 것이다. 안 맞는 옷 입고 뽐내는 것처럼 어색한 일이 또 있을까.

 

올 봄에 위안 받은 몇 권의 시집에서 이규리 시집으로 위로를 받는다. 몇 권의 시집을 냈지만 그의 시를 꼼꼼하게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규리 시는 참 정갈하다. 환갑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맑은 소녀의 정서를 간직한, 곱게 늙은 완숙의 여인이 이런 모습일까.

 

 

나는 잠깐씩 죽는다

눈뜨지 못하리라는 것
눈뜨지 않으리라는 것
어떤 선의도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
불확실만이 나를 지배하리라

죽음 안에도 꽃이 피고 당신은 피해갔다

 

*시인의 말

 

유독 시인의 말에 눈길이 가는 시집이 있다. 눈물 많은 소녀가 어느덧 세상을 달관한 듯 죽음을 담백하게 말한다. 주름이 졌지만 아름다운 눈매를 가진 시인의 눈길은 세상의 모든 풍경이 감사할 뿐이다. 어디서 온 줄 모르고 세상에 왔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에 인생은 아름답다.

 

종교가 없는 나도 극락과 천국을 믿는다. 그러나 오직 살아 있을 때 내 마음 속에 천국을 담고 산다. 죽으면 세상에서 별똥별처럼 사라지듯 내 마음 속 천국도 사라질 것이다. 사후의 안락한 보험보다 사전의 요긴한 예치금을 더 믿는다. 

 

 

누구나 불행한 상처만 기억하니까

불행할수록 기억이 많아지니까

 

마데카솔 광고는 처음처럼 돌아온다 돌아온다는데

누구라 처음을 알까

 

고쳐 앉으며 돌아누우며 비루한 지상의

상처를 믿어보는 것

 

영리한 사람은 기억하고 선량한 사람은 이해하겠지

물집이었던 시간에

칸칸 세 들어

 

우린 이전을

이미 살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시, <거즈의 방식> 일부

 

이 시집의 대표작이라 생각되는 이 시를 반복해 읽는다. 죄 많은 내 인생에서 희망은 일종의 영치금 같은 것, 그래서 날마다 기쁘고 소중한 새날이다. 뻭 먹기 좋은 곶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난히 일찍 핀 꽃들은 벌써 졌지만 아직도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