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 천수호 시집

마루안 2021. 4. 3. 19:27

 

 

 

드디어 천수호 시인이 세 번째 시집을 냈다. 일상에서 드디어라는 단어를 쓸 곳이 여럿 있기에 나도 여기에서 드디어를 쓴다. 어쩌면 그의 세 번째 시집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드디어가 더 반갑게 느껴진다.

 

남자 이름처럼 들리지만 천수호 시인은 여성이다. 꾸준하게 시를 쓰는 비교적 모범 시인에 속한다. 이 시집에 붙이는 드디어라는 부사도, 모범 시인 호칭도 내 맘대로 내린 결정이다. 평소 생각이 적어도 세 권쯤 시집을 내야 시인이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다고 본다.

 

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가늠할 수 있을 때도 그 시인의 시를 세 권쯤 읽어야 한다. 이 시인도 드디어 나온 세 번째 시집에서 절정에 달했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 시집이, 두 번째 시집보다 이번 시집이 완성도가 높다. 시인은 동의 안 할지 모르나 내 생각은 그렇다.

 

사람마다 먹는 식성이 다르듯 호불호가 있겠지만 나는 이 시집에 깊은 공감을 했다. 한 편 한 편이 서늘한 울림과 함께 처지는 작품이 없을 정도로 고른 감동을 준다. 반복해서 읽어도 단물이 쉽게 빠져 나가지 않는다.

 


너만 알고 있어라

사십 년 동안 밀어낸 말이
저기 눈앞에 모래로 남아 있다

넌 내 아들이 아니란다

오륙도가 풍랑에 잠긴다

울음소리를 덮으려고
파도가 모래밭을 때린다

넌 태생(胎生)이 아니라 난생(卵生)이었어
듣지 않으면 좋을 대답을 왜 들으려는지
그리하여 희망은 맹목적인 것이 된다

 

*시, <오륙도> 일부

 

시를 읽다 보면 이 시인은 사무침이 참 많은 사람이구나 싶을 때가 있다. 이 시가 그렇다. 시에도 연륜이 있다면 이 시는 동그라미가 하나씩 늘어난 게 아닌 군더더기를 하나씩 덜어낸 시다. 이런 시는 울림도 오래 가지만 유통기한이 길게 마련이다.

 

 

비문증(飛蚊症) - 천수호 

꿈과 현실
나는 헷갈렸지만

모기는 피도 없이 들락거렸다
코를 골고 있는 너를 내려다보면
꿈 밖으로 터져나오는 현실의 비애 따위는
꿈에 긁는 한 쪽 뺨이었다
웃는 너는 종종 꿈속에서만 만났고
한 방울의 피는 현실에서 빠져나갔다
잠 속에서 뺨을 치며 너는 모기를 쫓고 있지만
현실에선 도무지 터지지 않았다
꿈 밖에는 쫓는 눈이 많아서
꿈속에서 손을 쓰는 건 속수무책이다
가끔 네 손을 대신해서
너의 뺨을 한 번씩 긁어주지만
눈을 뜨지 않는 너보다
나는 더 깜깜해져서
물어뜯긴 이빨을 찾지 못했다
나를 더듬어 찾던 네 손이
경계를 허문 내 옆구리에 잠시 닿았다 간다
네가 거두어 간 것은
빈손이었지만
나는 자꾸 앓듯이 피를 닦았다

 

만약 내가 10년 전쯤 이런 시를 읽었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드디어 세 번째 시집을 읽고 천수호 시인을 온전히 내 마음에 담는다.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라는 다소 초현실적인 제목도 인상적이다. 자주 꺼내 읽으며 오래 음미할 만한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