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후 - 박민혁

마루안 2021. 11. 27. 21:41

 

 

그 후 - 박민혁


슬픔을 경제적으로 쓰는 일에 골몰하느라 몇 계절을 보냈다.

나를 위탁할 곳이 없는 날에는 너무 긴 산책을 떠난다. 목줄을 채운 생각이 지난날을 향해 짖는 것하며, 배변하는 것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건 거의 사랑에 가까웠지만, 결코 사랑은 아니었다는 식의 문장을 떠올려 본다. 모든 불행은 당신과 나의 욕구가 일치하지 않는 데서 온다.

병구완이라도 하듯 아침과 저녁은 교대로 나를 찾아왔다. 한마디 상의도 없이.

좋은 냄새가 나는 아기를 안아 주고, 도닥여준다. 아기를 좋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름다운 것은 인생이 아니라 기어코 비극적이려는, 고삐 풀린 그것을 길들이는, 인간이다.

집에 놀러온 신은 내 일기를 들춰보다가, "신이란 신은 죄다 불량품인지, 뭘 가지고 놀든 작동이 잘 안 돼서"라는 구절을 보고 표정이 굳어진다. 그러나 그쪽이 인생에 관여하는 건 너무 이상한 일이라고. 시는 시일 뿐이라고.

친구는 집을 샀다고 했다. 나는 아직 내 명의로 된 단어 하나 갖지 못했다.

폴리아모리를 알게 된 뒤로는 사랑 같은 거, 시시해져 버렸다. 통념 안에서 목숨 거는 일이 죄다 촌스러워졌다.

나를 위협하는 사람을 간발의 차로 따돌리고 꿈 밖으로 나온다.

당신이 떠난다고 했을 때, 나는 작고 둥그런 불가항력을 입안에 넣고 굴리며, 잠시 슬퍼졌다. 오래 만나야만 가질 수 있는 슬픔이 있고, 그 슬픔 하나를 빚은 것은 우리의 기쁨이다. 그리움에 녹이 슬었다.

원하는 걸 가질 방법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걸 꼭 취하고 싶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개처럼 취할 거다. 꼬인 인생은 꼬인 혀로 말해야 하니까.

나는 왜 이리 매사에 시적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시집/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파란출판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 - 박민혁


액상의 꿈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매달고, 생시 문턱을 넘는다.

애인의 악몽을 대신 꿔 준 날은 전화기를 꺼 둔 채 골목을 배회했다. 그럴 때마다 배경음악처럼 누군가는 건반을 두드린다.

비로소 몇 마디를 얻기 위해 침묵을 연습할 것. 총명한 성기는 매번 산책을 방해한다. 도착적 슬픔이 엄습한다.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부모에게서, 향정신성 문장 몇 개를 훔쳤다.

아름다웠다.
괘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경외한다. 우리들의 객쩍음에.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유 없이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나의 지랄은 세련된 것, 병법 없이는 사랑할 수 없다. 너는 나의 편견이다.

불안과의 잠자리에서는 더 이상 피임하지 않는다. 내가 돌아볼 때마다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비극을 연기한다. 우울한 자의 범신론이다. 저절로 생겨난,

저 살가운 불행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럴 때마다 생은 내 급소를 두드린다.

나와 나의 대조적인 삶.
길항하는, 

꼭 한 번은 틀리고 말던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

고통의 규칙을 보라.

 

 

 

# 박민혁 시인은 1983년 출생으로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동국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7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했다. <대자연과 세계적인 슬픔>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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