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일기 - 김진규

마루안 2021. 11. 29. 22:47

 

 

일기 - 김진규


익숙함 때문에 찢어버린 문구가 어느 날 늑골처럼 아늑하다 느낄 때
영원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말보다 더 아름다울 때
그런 날이 누구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은 날

 

어디론가 계속 옮겨 다니는 오늘이 지나 아직은 행복한 내일의 마음을 끌어다 쓰고 발바닥을 손바닥으로 닦아내며 내 기분을 거기 전부 적어둔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건 영원히 내 것이 아니듯
등 뒤로 떠나는 얼굴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없고
어떤 날에는 며칠쯤 일찍 찾아올 불행을 느낀다
그런 날에는 고작
나도 혼자 뛰어내릴 수 없는 절벽쯤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보지만

허나 발을 구르면 빛나는 비명들에 대해
불이 켜진 방에 가만히 앉아
누구도 불러주지 않는 지난날에는
숙취보다 오래가는 불안함에 대해

꾹꾹 눌러썼지만, 알아볼 수 없는 글씨
소리 내어 읽을 수도 없는 글씨

분명 지나간 일들이라 적었지만
그래도 종종 그 시간을 다시 살게 되니까

어떤 것들은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예언이 되어도 좋겠다
어떤 것들은 미리 써둔 일기가 되어도 좋겠다

 

*시집/ 이곳의 날씨는 우리의 기분/ 여우난골

 

 

 

 

 

 

가족회의 - 김진규


아버지의 첫 사업이 망했을 때, 우리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커다란 통나무 식탁에 둘러앉아 차를 마셨다 너무 막연한 게 아닐까? 행복이란 건, 거실은 어두워졌고 차는 식어가고 있었다 일주일 전에 버렸던 소파를 생각했다 소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없는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꿈속에선 윗동네와 아랫동네, 장마철엔 홍수로 발목까지 차오르던 흙탕물, 단단한 쇠창살 사이로 흘러드는 윗동네, 철 지난 낙서마다 마음이 깃들어 잊고 있던 소식같이 슬퍼지던 아랫동네, 자주 그 꿈에 갇혔다 사람이 아직 살고 있을까? 의심이 마지막 안부가 되던 곳

 

고춧대를 뽑으며, 우리 가족은 같이 땀을 흘렸다 아버지가 흘린 땀은 옷에도 스며들지 않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새빨간 고추도 다리 사이로 후두둑 떨어졌다 고추가 떨어진 곳엔 태지 같은 일들이 흩어져 있었다 모기가 들끓고 있었다 그것들은 병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회의가 없는 날에도 나는 혼자 통나무 식탁에 앉아 회의를 한다 너무 막연한 게 아닐까? 행복이란 건,

 

모난 곳이 없이 자란 나이테를 보며, 이미 만들어진 운명을 보며,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골목들을 짚어가며, 통나무 식탁에 손가락을 얹고 보니, 먼 옛날부터 비어 있었던 자리였던 것처럼

그 자리에 둔 내 손가락은 나무의 이음새였다

 

 

 

 

 

*시인의 말

같은 꿈을 스무 번째 꾸던 날. 슬퍼하는 나와 기뻐하는 나는 같은 사람이었다. 그게 서러울 때마다 잠꼬대를 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무도 듣지 못해서 기뻤다.
누군가를 걱정할 필요 없이 울었다.

아무도 그런 적 없다는 듯, 나만 거기서 영원히 살 것만 같다.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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