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마루안 2021. 11. 22. 22:32

 

 

묻는다 물어야 해서 - 안태현


머잖아 겨울이 오면
마스크를 벗고 내 반의 얼굴을 드러내도 되나

앙상한 늑골 사이로 주린 바람이 달려가는 도시의 귀퉁이 탁자에 희박하게 앉아
얼큰한 육개장을 마음껏 먹어도 되나

집 냄새에 찌든 사람이 모처럼 노선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묻혀온 
무덤이 따로 없더라는 진흙 같은 적막함

여기까지 왔대
느닷없는 소름이 이웃 아파트 단지까지 밀고 오면
나는 뒷문을 하나 더 만들어 놓는다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짐승이 들뜬 분위기를 퍼뜨려놓고 이제나 저제나 방심을 기다리는
왕국의 동토 지대를
쏜 살보다 빠르게 건너갈 수 있나


만화경을 돌린 듯이 모든 걸 헝클어버린
이간질 같은 안개 숲

기울어진 것은 균형을 찾으려 수십 번은 흔들리고 자작나무처럼 하얀 껍질을 벗으면
그 사이 몇 살이나 더 먹은 나를 알아보려나
말문이 다시 트이려나

 

 

*시집/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 상상인

 

 

 

 

 

 

언뜻 - 안태현


공동묘지다
아무것도 더는 가져갈 수 없는 곳인데
빈손으로 가지 않을 것처럼
때늦은 바람이 분다

죄를 온전히 사할 수 없어서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
나의 십자가

그래서 늘 감았다 풀었다 하는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어딘지 지독하게 스며 있는 
생의 리듬
늦은 밤에도 커다란 밥술을 뜨게 하는
그 단단한 악기

나는 여전히 반주 없는 돌림노래에 취해 있다

내 입술 위를 흘러
올해도 빈손인 채 단풍이 가고
언뜻 묘비에 앉은 새는
지나온 절정과 비애를 노래하지 않는다

한꺼번에 서녘으로 밀려가는 것 중에
무엇보다 크고
무엇보다 작은
내가 있다

 

 

 

 

# 안태현 시인은 전남 함평 출생으로 2011년 <시안>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이달의 신간>,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최근에도 나는 사람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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