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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

한줄 詩 2017.12.04

그립다는 말 - 조찬용

그립다는 말 - 조찬용 이순이 가까운 시절 한때 찔레꽃같이 피었다 시든 그 유장한 길들의 몸부림을 생각하면 그립지 않은 것들이 없다 살아온 게 아니고 밥벌이에 목을 매 살아진 게 아니었느냐고 말을 해도 이젠 낯부끄러울 것 없는 이유와 덤덤해진 변명 아물아 흘러온 인생아, 남은 시절은 또 얼마나 그리울 것이냐 *시집, , 북랜드 소풍 - 조찬용 아이들이 성벽 길을 줄지어 소풍을 간다 두 노인네 느티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며 아이들을 바라본다 거쳐 온 인생과 거쳐 가는 인생 사이 공간의 담장 벽 덜렁 둘이 마주앉은 황혼의 길에서 장기를 둔다 그땐 우리도 많이 설레었지 그랬었지 잠을 이루지 못해도 아침은 환했었지 하루하루 덮고 나면 이리 지나온 일인 것을 말이네 꿈길을 걸어온 셈이지 저 아이들도 오늘 꿈길을 ..

한줄 詩 2017.12.03

늦가을 저녁 비 - 황동규

늦가을 저녁 비 - 황동규 잿빛 소리로 공기를 적시며 비 내리는 저녁 늦 산책에서 돌아오다 만난 이층집 미니 뜰 서로 기대거나 넘어져 누운 줄기들 속에 혼자 고개 쳐들고 서 있는, 안개처럼 자욱이 내리는 잿빛 음성에 붉은 입술 붉은 혀 내밀고 있는 장미 한 송이. 어느 결에 빗소리에 침이 마른다. 혀와 음성, 붉은색과 잿빛이 입 마주대고 서로를 맛보고 맛보여주고 있는가? 무슨 맛인진 모르지만 서로가 한 몸이 되겠다고 글썽글썽 맛보고 맛보여주고 있는가? 어느샌가 어두워져 소리밖에 뵈지 않아도. 세상에 헛발질해본 사람이면 알지, 저 소리, 밖으로 내놓지 않고 마냥 안으로 끌어만 당기는 저 음성, '이 저녁 견딜 만하신가?' *시집,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11월의 벼랑 - 황동규 어디에고 달라붙어보지 ..

한줄 詩 2017.12.03

노숙자의 가을

지난 봄부터였던가. 정확하게 기억은 못 하겠다. 어쨌든 꽤 오래 그를 지켜봤다. 지켜 본 게 아니라 그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매일 그곳을 지나간 것은 아니다. 지나 갈 때마다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켰다는 얘기다. 그를 볼 때면 잠을 자거나 컵라면을 먹거나 신문을 보거나였다. 언제는 수염이 덥수록한 부시시한 모습이었다가 어느 날은 말끔한 차림일 때도 있었다. 컵라면을 먹는 걸 보면 그이 만의 생존 방식이 있는 모양이다. 그는 풍경이 아니라 각인이었다. 비교적 포근했던 가을 날씨가 며칠 사이 겨올로 변했다. 곧 닥칠 겨울이 걱정 없는지 평온하게 신문을 읽고 있다. 오늘은 저 신문으로 하루를 묵히기 알맞을 것이다. 모쪼록 이 겨울이 그를 비껴갔으면 한다.

열줄 哀 2017.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