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행운목 - 정해종

마루안 2017. 12. 3. 21:56



행운목 - 정해종

 
 

처음부터 열매를 보고 자란 것은 아니다
내게 삶은 그렇게 달디 단 것은 아니었다
지리한 연대기의 어느 마디에서 혁명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리라 믿었던 건 더욱 아니다
내게 삶은 그렇게 아름다운 게 아니었다


길지 않은 생의 어느 순간에 스윽-- 베어져
허연 속이 무방비로 드러나는 치욕의 나날
여기서 끝나도 좋았다, 끝장이 나도 좋았다
처음부터 끝을 바라보고 자란 것은 아니다
내게 삶은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게 끝났다고는 생각 마라
끝장나도 좋은 순간에 내 삶은 시작된다
절망으로부터 나는 부활하는 것이다
봐라, 거칠고 밋밋한 몸통의 옆구리며
겨드랑이에 솟구치는 내 푸른 날개를



*시집, 내 안의 열대 우림, 생각의나무

 







리허설 - 정해종



내게 사랑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불완전명사
그저 첫눈처럼 순결하게 몰두했던
순간들의 이름일 뿐이었으므로,
지나간 모든 것들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아니다, 그게 아니다
사랑은 자세를 낮추고
한없이 자기를 버리는 일
마음의 두레박을 끌어올리고 뒤집어 엎는 일
그러나 그렇더라도
이미 지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다


눈이 내린다, 지나간 모든 날들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던 모든 시간들
온다는 기별도 없이 찾아왔던 순간들
내가 운명이라 믿었던 그것들
모두 다 눈에 덮인다, 잘 가라
돌아오지 않을 열차에 무임승차했던 무모한 기억들아
불빛 꺼져가는 낯선 도시에서 불러보았던 이름들아


눈은 이미 세상 모든 것을 덮고
내가 사랑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건
그것이 끝났을 때의 번민 뿐이다
지나간 모든 것들
사랑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었다고
다음 사랑의 마지막 예행연습이었다고 하자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길 위에 흔들리다 - 김재진  (0) 2017.12.04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0) 2017.12.04
그립다는 말 - 조찬용  (0) 2017.12.03
강을 건너듯 길을 건널 때 - 김진환  (0) 2017.12.03
중년 - 강연호  (0) 2017.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