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가을 저녁 비 - 황동규

마루안 2017. 12. 3. 19:28

 

 

늦가을 저녁 비 - 황동규

 

 

잿빛 소리로 공기를 적시며 비 내리는 저녁
늦 산책에서 돌아오다 만난 이층집 미니 뜰
서로 기대거나 넘어져 누운 줄기들 속에
혼자 고개 쳐들고 서 있는,
안개처럼 자욱이 내리는 잿빛 음성에
붉은 입술 붉은 혀 내밀고 있는 장미 한 송이.
어느 결에 빗소리에 침이 마른다.
혀와 음성, 붉은색과 잿빛이 입 마주대고
서로를 맛보고 맛보여주고 있는가?
무슨 맛인진 모르지만 서로가 한 몸이 되겠다고
글썽글썽 맛보고 맛보여주고 있는가?
어느샌가 어두워져 소리밖에 뵈지 않아도.


세상에 헛발질해본 사람이면 알지,
저 소리,
밖으로 내놓지 않고 마냥 안으로 끌어만 당기는
저 음성,
'이 저녁 견딜 만하신가?'

 

 

*시집,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11월의 벼랑 - 황동규

 

 

어디에고 달라붙어보지 못한 도깨비바늘 몇
마싹 마른 꽃받침에 붙어 있다.
후 불어도 떨어지지 않는다.
저도 모르게 주저앉을까봐
서로 붇들고 선 줄기들.
새파랗다 못해 하늘이 쨍 소리를 낸다.
한 발짝 앞은 바로 벼랑.
방금 한 사내가 한참 동안
철 지난 유령처럼 서있다 간 곳.
옆을 스치는 그의 얼굴
절망의 얼굴로 보지 않기로 한다.
11월의 뒷켠 어디선가 만나는 인간의 표정.
얼굴에 그냥 붙어 있는 표정.
절망조차 허영으로 보일 때가 있다.
몸과 마음 어디엔가 제대로 헌번 붙여보기도 전에
눈앞에서 땅이 바로 수직으로 꺼지기도 하는데.

 

 

 


# 황동규 시인은 1938년에 평안남도 숙천에서 황순원 소설가의 맏아들로 태어나 1946년에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대 영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미국 뉴욕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즐거운 편지>를 포함한 시 3편이 서정주 시인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어떤 개인 날>,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악어를 조심하라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겨울밤 0시 5분>, <꽃의 고요>, <사는 기쁨>, <연옥의 봄>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김종삼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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