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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가에 물집처럼 - 김두안

입가에 물집처럼 - 김두안 달이 뜬다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 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쫓겨가는 통제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시집, 달의 아가미, 민음사 덫 - 김두안 새벽 묵호항 눈이 내린다 한 사내 담장 밑에 앉아 그물을 꿰맨다 온통 주름에 휘감겨 몸부림친 얼굴 상처를 접고 상처를 펼친다 찢기고 터진 자리 대바늘이 파르르 손등을 파고든다 사내의 시린 손마디가 눈발 ..

한줄 詩 2017.12.11

안녕하신가, 나여 - 류흔

안녕하신가, 나여 - 류흔 그때에는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지 내 고독을 말리려고, 그의 양지를 빌리지는 말았어야지 여태 갚지 못한 그의 빛을 빚처럼 안고 사는 나여 산다는 것을 무엇으로 견디는지 밤새 뒤척인 잠과 뒤적인 꿈으로 머리맡 갈증은 벌컥벌컥, 화를 내고 그래 밤새 안녕하신 이들 속에 내가 있었구나 흔치 않은 그가 쓰윽 돋아난 거울 속에 턱을 올려놓고 면도날을 박아넣거나 거품을 닦아내거나 새로 돋아난 새치를 뽑거나 수십 년 빚어놓은 얼굴을 돌보면서 얼핏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무엇으로 견디며 참 기적으로 살아왔는지 살아갈지 *시집, 꽃의 배후, 바보새 자화상 - 류흔 이미 늙기 시작한 시간을 나는 외면한다 노쇠한 시간은 세월 탓이라고, 내가 겪어온 설움 때문에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울 앞에선 반대..

한줄 詩 2017.12.11

만들어진 간첩 - 김학민

초등학교 다닐 적에 매일 아침 학교 운동장에 모여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들었다. 그 훈시에 간첩 신고를 해야 한다면서 간첩 찾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간첩을 신고해 잡게 되면 엄청난 포상금이 주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내 주변에 간첩을 봤다는 사람도 포상금을 받았다는 사람도 없었다. 가수 김추자가 노래를 부르면서 추는 춤이 간첩들에게 보내는 수신호라는 소문만이 춥고 삭막했던 우리들 사이에 파다했다. 당시 나는 그 소문을 믿었다. 그 시절 매주 친구집에 놀러가서 흑백 테레비에 나오는 113 수사본부를 열심히 봤다. 토요일 밤에 방송된 걸로 기억을 한다. 그 때 간첩들은 나쁘기가 인간도 아니었다. 이 책은 없는 간첩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간첩 활동으로 당국의 조사를 받던 중 자신이 ..

네줄 冊 2017.12.10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

서경식 선생의 서양미술기행 책을 뒤늦게 읽었다. 10년 전쯤인가 을 읽고 나서 미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번 책도 여전히 다른 책과 구별되는 미술 도서다. 마치 그를 따라 미술관을 여행하는 기분이다. 그의 오랜 미술관 기행은 일본의 신문이나 방송에 정기적으로 실린다. 그런 경험을 책으로 냈는데 이번 미술기행 책이 3 권째다. 보기 좋고 예쁜 미술보다 인간의 아픔을 표현한 미술에 유독 관심을 두는 사람답게 이 책에서 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그림도 참 좋다. 오토 딕스 또한 정권에 저항하고 시대와의 불화를 겪으며 일생을 보낸다. 서경식 선생의 책은 읽을 때마다 지성인의 표상을 본다. 그의 미술기행을 따라 가다 보니 왜 그가 이 시대의 진정한 지성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좋은 책을 ..

네줄 冊 2017.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