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 손병걸
아빠 식사하세요
밥때만 되면
아이의 목소리 들린다
자식이라고는 단 하나
고작, 초등학교 3학년
생일이 빨라서 3학년이지
이제 아홉 살짜리다
밥상에 앉으면
이건 김치, 빨개요
요건 된장찌개, 뜨거워요
두 눈이 안 보이는 아빠를 위해
제 입에 밥알이 어찌 되든지 말든지
오른쪽에 뭐 왼쪽에 뭐
아이의 입은 바쁘다
요란한 밥상이 물러나면
커피는 두 스푼
설탕은 한 스푼 반
크림은 우유가 좋다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게
깡충깡충 커피를 가져다 준다
아홉 살짜리 아이가
아빠를 키운다
*시집,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애지
흰 머리카락 - 손병걸
검은 머리카락 뽑는 것이 빠르겠다며
곁에서 일어난 딸내미가
방바닥에 널린 옷들을 그러모아
세탁기 앞으로 걸어간다
두 눈 멀기 전 거울에 비친
탱탱한 피부와 새까만 머리카락만 기억하고 있지만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
비루한 자국만 남겼나 보다
꾸륵꾸륵 목구멍을 훑어대듯
하수구를 관통하는 저 물소리
그래, 매번 옷 갈아입는 것이 삶이어서
빨고 빨다가 탈색된 옷들처럼
희멀게진 생은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어디 세상에 변한 것이
내 몸뚱어리와 머리카락뿐이랴?
안방을 차지한 텔레비전을 기어 나와
달팽이관을 후벼대는
뉴스 속 저 검은 말들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변해버린 것들에 대하여
어느 날 아침, 보이지 않는 두 눈이
번쩍 떠지지나 않을까 두려울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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