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독의 뒷모습 - 김륭

마루안 2017. 12. 11. 23:18



고독의 뒷모습 - 김륭



쓰레기통 속에 콕, 처박힌 종이를 쳐다보는데 바르르 살이 떨리던 날로부터 나는 신발장 속의 신발보다 많은 발을 가진 웅덩이


내가 내 품에 안겨 있다는 느낌이 더러워 손발을 나누어 주었지만 차라리 벽돌이라도 구워낼 걸 그랬다 쌀쌀맞게 돌아선 여자의 등짝보다 단단하게


나는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했으므로 물 한 모금 마시고 힐끗, 하늘 한 번 쳐다보는 노란 병아리처럼 노랗게.


나는 무사히 식어가는 중인데 바람 든 뼈와 살 사이 종잇장처럼 끼어 있던 죽음이 파르르 신발 한 짝 말아 쥐고 쓰레기통 속의 나를 앙상하게 엎질러놓는 저녁


아무런 병도 없이 수혈받은 남의 피를 콕콕 찍어 바른 저것들만이 내 것이었으니, 내가 가진 전부였으니, 물주전자 같은 내 몸의 코를 탱탱 풀어준 영혼이었느니.


사거리 부서진 공중전화 수화기가 누군가의 목을 움켜쥐고 축 늘어진 날로부터 내 피는 흙이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 몸이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문학동네








올 가을은 몇 번이나 웃을까 - 김륭



염소수염을 가진 사내의 입에서 여자의 한쪽 뺨이 새어나왔다 저기서부터 쓸쓸함의 영역, 물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여러 번 웃는 사람들이 문득 싫어졌다 사내의 염소수염이 서둘러 둥근 접시 위에 울음을 뱉었지만 돌돌 말린 사과의 붉은 기억 속엔 풀처럼 칼이 자라고 있다 두려워 말아요, 나는 더이상 곁에 없을 거예요, 마침내 당신 안에 있는 거예요


여자는 사내의 깜깜한 몸속에서 어떻게 허공의 피를 묻혔을까


늙은 사과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고 누워있는 사내의 옆구리 쿡쿡 찔러 나는 백년쯤이면 새파랗게 날 선 칼 한 자루로 피어날 수 있겠지만 더이상 웃을 수가 없다 내가 나를 웃어넘기려면 당장 열 개의 손가락이 더 필요한데, 아무래도 사과는 사과 꽃으로 들어가는 문을 모른다


두 손으로 감싸 쥔 여자의 뺨을 쪼개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사과는 발그레 딱 한 번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