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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없었기에 떠났다 - 정윤수

밑도 끝도 없이 나와 닮은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이 책은 제목도 내용도 딱 내 이야기다. 오래 전 가랑잎처럼 홀로 떠돌 때 고독은 나의 친구였다. 지금도 여전히 외로움을 비타민처럼 여기며 살지만 여행길의 고독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이 책은 정윤수가 홀로 떠난 발자국을 따라간 흔적이다. 여행 안내서는 아니고 여행 인문학이라 해야 맞겠다. 홀로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여행길은 대부분 예전에 내가 갔던 길이다. 시대와 함께 도로는 포장되고 풍경은 바꼈으나 인문학적 풍경은 오롯이 책에 담겼다. 새것이 좋은 것인 시대이기에 조금만 낡으면 부수고 새것이 들어선다. 정윤수의 여행길도 이런 곳이 대부분이다. 19살에 청춘의 무게를 자전거에 싣고 전국을 여행했던 청년은..

네줄 冊 2017.12.26

패터슨 - 짐 자무쉬

패터슨은 버스운전사다. 미국의 작은 도시 패터슨에서 시내버스를 운전한다. 택시운전사가 승객이 원하는 곳을 가야한다면 버스운전사는 정해진 노선을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듯 정해진 길을 반복해서 운행한다. 어쩌면 우리 일생도 버스노선처럼 반복의 일상이다. 패터슨은 주인공의 이름이자 도시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패터슨은 시인이다. 영화를 보면 도시 자체가 참 시적이다. 삐까뻔적 화려한 도시가 아닌 세월의 흔적이 묻고 낡은 건물 주변 환경이 시가 절로 써질 환경이다. 매일 이른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들고 버스회사로 출근해 정해진 노선을 돌고 나면 퇴근이다. 아내와 저녁을 먹고 개구장이 강아지 불독과 산책을 하고 단골 술집에서 맥주 한 잔을 마시면 하루 일과의 마감이다. 패터슨이 지루한 ..

세줄 映 2017.12.25

길 위의 나날 - 김유석

길 위의 나날 - 김유석 사막을 건너와서 모래바람과 갈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또 다시 사막으로 간다. 처음보다 적은 물통과 생각, 더 늙은 낙타를 앞세우고 부유하는 물풀처럼 걷는다, 처녀림을 헤쳐나가는 일보다 이미 드리워진 것들의 내력을 불러들이며 걷는 길은 몇 걸음 뒤에서 이내 지치고, 쉬어가는 곳마다 벗었다 다시 짊어지는 짐의 무게도 다 다르지만 모래와 바람만으로 수많은 갈래를 긋고, 또 지워버리는 사막 초행이 아닌데도 필경 같은 곳에서 길을 놓치는 것은 걸으면서 꿈꾸어야 하는 삶이 사막 어딘가에 서늘한 나무그늘을 감춰두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와디처럼 흔적만을 남기는 것들이 태우는 목마름을 안고 저만치 오아시스를 지나쳐야 하는 까닭이다. 흘러간 것은 흘러가버린 것, 훗날 선술집 탁자에 기대어 중얼거..

한줄 詩 2017.12.25

폭설 - 육근상

폭설 - 육근상 제설차 한 대 오지 않는 세상 어디로 가야 하나 오촌 댁이라도 가볼까 거기도 죽는 소리 한가지인데 대학이랍시고 나와 눈만 높아져 악다구니 쓰던 막내 년 뛰쳐나간 지 넉 달째 소식 없고 엄니는 잠결에도 막내만 부르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 가 취직자리 부탁해야 하나 어스름 눈길 미끄러져 부속고기 집에서 소주 마시다 보면 실없이 웃음 헤퍼지는구나 싸대기 때리는 눈발만 바짓가랑이 부여잡고 울어쌓는구나 *시집, 절창, 솔출판사 면벽 - 육근상 재래시장 쪽방에서 소주 마시는 날 있지만 날리는 눈발이 별소릴 다하며 어르는 날 있지만 한 숟가락씩 뚝뚝 떠먹는 순대국밥은 알까 사는 일 각박하여 싸움이라는 말 생겨나고 눈물이라는 말 생겨나고 깨진 세간살이가 생겨난 것인데 사내라는 말 앞에서 왜 울화통이..

한줄 詩 2017.12.24

태백, 겨울 - 이은심

태백, 겨울 - 이은심 ​ 너와집 정지간에서 장작불을 지피는 아낙은 아이 셋 낳고도 동아줄 타고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 자신밖에는 구해줄 이가 없다고 굳세게 우거지는 뒷산 나무들 그 밑둥에 덧대어 차린 밥집 마당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얼어붙어 칼이 되었다 투명한 날개옷 한 벌도 아낙의 가슴에서 평생 버석거릴 터 신탁을 깨트린 눈이 내리고 사모하면 더 깊어지는 적막강산 사실보다 더 아름다운 환상은 없다 눈 쌓인 아침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밥을 푸는가 아낙의 반쪽 옆얼굴이 어룽져 갈라터진 바람벽에 하마 해를 넘겼을까 다리 다친 까치들이 글자를 찍어놓았다 - 어서 빨리 오십시요 - 꼭 또 오십시오 *시집, 오얏나무 아버지, 한국문연 안개 - 이은심 저 물 속에 무슨 가슴 터지는 이 있어 줄담배를 피어대나 그..

한줄 詩 2017.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