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가 붉어지는 이유 - 이강산 그러니까 내가 이 골목을 고집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늦바람이 든 거다 곰곰 짚어보자면 바람은 생의 발단쯤에서 복선처럼 스쳐갔던 것, 절정의 뒤꼍에서 가으내 골목 힐끔대는 이 노릇이란 내게 휘어질 생의 굽이가 한마디쯤 더 남아 있는 탓이려니. 때도 없이 붉어지다 뼈가 부러진 옆집 대추나무 훔쳐보듯 은근슬쩍 바라보면 봉충다리 막냇누이의 봉숭아물 같은, 눈물 같은 선홍(鮮紅). 누군가의 연모 지우려 제 스스로 허벅지 찌르지 않고서야 저토록 노랗게 붉어질 이유가 없지 않느냐 늦바람이 든 거다 저도 나처럼 울긋불긋 바람의 단풍이 든 거다 *이강산 시집, 모항, 실천문학사 구절사 - 이강산 허물어진 산신각 터 벼랑 끝은 가을이다 벼랑 아래 가을은 어쩌다, 저토록 깊어서 손금 가늘고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