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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적 공간 - 오근재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나도 늙는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 언젠가부터 나는 노인을 공경하지 않는다. 후레 자식! 너는 안 늙을 줄 아느냐고 힐난할지 모르나 내 마음에서 노인을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노인을 공경하는 것도 일종의 차별이다. 나이 먹은 사람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똑같이 존중 받아야 한다. 주변에서 매사에 목소리부터 높이는 진상 노인을 목격하는 일이 너무 흔하다. 연륜이 쌓일수록 너그러워진다는데 그 반대로 포용심은 늘지 않고 심술만 늘었다. 젊을 적 예비군 훈련장에 가면 넥타이를 매던 직장인들이 예비군복 하나로 행동이 바뀌는 걸 봤다. 아무 곳에나 소변을 보고 조교의 교육 지침에 딴지를 걸기도 한다. 구별되지 않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벼슬..

네줄 冊 2017.12.23

되돌아오는 것들 - 박승민

되돌아오는 것들 - 박승민 누런 설탕에 쟁여둔 산복숭아 체액을 자꾸 밖으로 게워낸다 마지막 병상에서는 너도 물 한 모금도 거절했지 복숭아뼈를 간신히 감싼 거죽만 남은 달이 붕 떠 있다 살을 고스란히 받아낸 노르스름한 당(糖)은 너의 일생을 농축한 습(濕)이었다고 화장장, 뼈를 태우고 구름 위로 노래하듯 풀려나가는 저 연기는 새로 받은 몸의 어떤 형상일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옛 얼굴은 멀리 후생(後生)까지 밀려갔다 가는 이따금씩, 끊은 담배 한 대의 간절함으로 기어코 되돌아오고야 마는데..... *시집, 슬픔을 말리다, 실천문학사 12월의 의식(儀式) - 박승민 -다시 명호강에서 시집(詩集)을 강물로 돌려보낸다. 봉화군 명호면, 너와 자주 가던 가게에서 산 과자 몇 봉지 콜라 한 캔이 오늘의 제수..

한줄 詩 2017.12.22

죽음 연습 - 이경신

모처럼 좋은 책 하나를 읽었다. 기대를 갖고 읽었어도 별로 감동이 없는 책들이 많은 세상에서 강력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마흔 이후의 중년들은 깊이 공감할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다 안다. 그럼에도 죽음은 누구나 피하고 싶다. 이라는 어두운(?) 제목과는 달리 죽음에 대한 깊이 있고 논리적인 글이 술술 읽힌다. 철학자의 글이 대부분 어려운데 이 책은 쉽다. 많이 배워 책 쓰는 자들의 특징이기도 한 저자의 입장이 아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썼기 때문일 것이다. 잘 늙고 잘 죽는 것을 넘어 잘 사는 것에 대한 사색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을 읽고 나면 잘 살고 싶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된다. 왜 모든 것이 말은 쉬운데 행동은 어려운 것일까. 잘 죽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도 실천이 그만큼 ..

네줄 冊 2017.12.22

심수봉 - 김경미

심수봉 - 김경미 적막하구나 강산 겨울 네 노래를 듣노라면 너무나 평범하던 여대생 뽕짝 들고 나온 가수에 우린 웃었지 노래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고 겨울 밤 네 목소리는 밀주구나 목이 아프다 가슴이 시큰거려 오늘 밤도 잠자기는 글렀는데 겨울 눈 널 따라 천지를 뒤숭숭 흐린 이 강산 가수로 태어나 여성억압사 남한 현대사 호주머니 속 꼬깃 꼬깃 잊고 빨아버린 지폐처럼 값 잃은 한, 뭉뚱그려 나는 행복한 널 왜 떠돈다고 맺힌다고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귀가 - 심수봉 어린 나이에도 눈치챌 수 있었지 가난과 싸움과 기도소리만 들끓는 집 되도록이면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려고 언제나 가장 마지막까지 동네 아이들 붙잡고 땟물 낀 얼굴로 늦은 밤까지 놀지만 노는 틈틈이 어린 가슴을 파고들던..

한줄 詩 2017.12.21

지극히 사소한, 지독히 아득한 - 임영태

언젠가부터 소설은 잘 안 읽는다. 읽어도 별로 감동이 없고 시시하게 느껴진다. 어쩔 땐 내가 살아온 날들이 소설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 임영태의 소설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도 참 시적이다. 그이 초기작인 를 읽었던 시절이 아득하다. 왜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쓸쓸함과 함께 모든 삶들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걸까. 읽으면서 줄곳 작가 이야기이자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큰 욕심 없이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는 주인공의 잔잔한 일상이 내 일기장을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힌다. 김훈의 소설처럼 빼어난 문장이 있는 것은 아니나 목덜미가 서늘한 대목이 몇 군데 있다.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옛 추억을 떠올리는 대목이다. . 예전처럼 그의 소설은 여전히 쓸쓸하다.

네줄 冊 2017.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