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마네킹, 그 겨울 오후 1 - 김이하

마네킹, 그 겨울 오후 1 - 김이하 한 천년쯤은 흘렀겠지요 그래도 그날 오후는 따뜻했습니다 아마, 당신의 눈빛이 내 가슴에 꽂히는 이 순간을 기다리면서 살았을 나의 계절은 몇 번인가 옷을 벗고 알몸으로 휘청거렸을 테지만 여기서 더 가깝진 못했지요 그래요, 그건 당신이 알지요 한 천년쯤은 훌쩍 흘러갔겠지요 빈방으로 돌아가고 빈방에서 나오던 당신이 내게서 멀어진 시간들 그 밤, 훅! 하고 방안에서 끼치던 살 냄새 그건 당신이 벗어 던지던 몸의 세월이겠지요 누가 알겠어요, 발부리에 걸린 빈 술병들 혼자 울다가 뒹구는 어둠을 날카롭게 누군가 가슴을 찌르고 도망치던 뒷모습을 누가 알겠어요, 천년의 세월도 덧없었음을 그 겨울 오후 절벽의 어둠을 떨구고 이제 막 거리를 덮는 물결 누군가 돌아오고 있군요 그러나 나의..

한줄 詩 2018.01.08

노동여지도 - 박점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빌린 제목이 독특하다. 노동여지도는 조선후기 김정호가 조선팔도 곳곳을 걷고 산을 오르면서 기록한 지도처럼 노동운동가 박점규가 남한 곳곳을 찾아 다니며 현재의 노동현실을 지도로 완성했다. 노동현장 답사기라 해도 되겠다. 그만큼 값진 책이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라 하면서도 육체적인 노동은 여전히 천시를 받고 있다. 거기다가 노동 현장도 사무직보다 기술직이 훨씬 열악하면서 임금도 저렴하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는 어떤가. 이 책은 그런 현실의 꼼꼼한 보고서다. 삼성의 도시 수원에서 시작한 여정은 전국 곳곳 노동 현장을 돌아 출판 도시 파주까지 이어진다. 스물 여덟 곳의 노동 지도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도시 전체가 대기업에 완전히 예속되어 있는 곳도 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 협..

네줄 冊 2018.01.08

눈물에 금이 갔다 - 김이하 시집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시집이 오래오래 내 마음을 사로 잡고 있다. 딱 무슨 책을 구입해야지 하는 생각이 아닌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헌책방을 들른다. 사람도 그렇지만 책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어 만날 책이면 언젠가는 만나고 못 만날 책은 평생 가도 엇갈리기만 할 뿐이다. 내 발로 들어간 책방이건만 마치 이 시집이 오랫동안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싶다. 이 시집 표지처럼 보라색을 보면 슬프다. 고귀함이나 귀족을 상징하는 색이면서 선뜻 선택하기 망설여지는 우울한 색이 보랏빛이다. 이것은 학자들이 정한 미학이나 심리학으로 접근한 이론이 아니라 그저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생각일 뿐이다. 어쨌든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한 무명 시인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도 시집 구성도 단촐하나 맑고 ..

네줄 冊 2018.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