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길은 죽음을 욕망한다 - 이수익

마루안 2018. 1. 5. 19:15



길은 죽음을 욕망한다 - 이수익



길은 처음 산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스며 있었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그 길을
따라 짐승들이 지나고 드문드문
유령 같은 인적이 밟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길은 살며시
들판으로 내려와 마을 오솔길이 되고
꼬불꼬불 논둑길이 되고 장터로 향해 가는
달구지길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씩 그리로
사람들 그림자도 붐비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은 산에서 산으로, 들에서 들로,
터널에서 터널로 이어진 사통팔달 길에는
속력의 쾌감을 마시며 차들이 질주한다
모든 길은 정면과 측면으로 가없이 뻗어 있고
가속 페달은 제한속도를 거부하고 있다
길은 이제
죽음에 도전하는 폭력의 코스가 되어 있다


길에 길들면서 사람들 또한
욕망한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에 몸을 내던지고 싶다고
마침내 저의 길을 끝내고 싶다고
끝없이 끝없이 사라지고 싶다고



*시집,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 시학








늦은 점심 - 이수익



당신의 몸이
하얀 뼈로 타오르고 있을 동안
우리는 화장장 구내식당으로 찾아가서
늦은 점심을 함께 했지요
당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우리끼리 설렁탕을 시키고, 육개장을 시켜 먹으며
남아 있는 목숨을 건사했지요
소주도 한 잔씩 돌렸어요
당신이 화로에서 살과 뼈를 태우고 있을
동안이 아니면 영영 식사시간도 놓치게 된다면서
빠른 동작으로 점심 한 그릇을 뚝딱 비웠지요
당신과 함께 나눈 식사가 바로 며칠 전이어서
생각하면 가슴이 메어 숟가락을 내려놓아야 했는데도
아아, 당신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역할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슬픔보다는 눈앞의 공복이 더욱 절실했거든요
이런 우리가 밉지는 않았나요?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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