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 번 노래하고 아홉 번 걸었다 - 권현형

마루안 2018. 1. 3. 19:58



한 번 노래하고 아홉 번 걸었다 - 권현형



목이 길어 숭고한 발가락을 난간에 얹어놓고
오래전 사라진 것의 물기가 남아 있다
세 가닥 단풍 무늬 같은 공룡의 앞 발자국
선명한 갑골문자를 새들이 해독하고 있다


그들은 한 번 노래하고 아홉 번 걸었을까
아홉 번 노래하고 한 번 걸었을까


바닷물이 고여 있는 웅숭깊은 발자국을 보니
습기를 머금은 퇴적층처럼 가슴이 뭉클뭉클해진다
그들은 분명히 지나갔다 내 몸속 실핏줄을 따라
해질녘이면 지금도 볼 수 있는
여러 그루의 검은 나무들처럼 바람에 몸을 흔들며


목이 긴 초식공룡들은 걷는 데 생애를 바쳤다
남쪽으로 걸어가는 무리들의 그림자가 눈에 선하다
느릿느릿 제 무겁고 아름다운 음영을 어깨에 싣고


남쪽으로 걸어간 걸음을 곰곰히 읽다가
버스 정류장을 놓쳤다
나는 한 번 노래하고 아홉 번 걸었다



*시집, 포옹의 방식, 문예중앙








1월 1일의 질감 - 권현형



하늘과 바다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 늙고 새로울까

 
새해 아침 바다는 정말 맛있게 생겼다
싱싱한 횟감의 질감을 가졌다
 

너무나 살고 싶어 하는 바다
바라보는 자의 골수까지 파랗게 물들이는

 
오늘에서야 기억하고 있던 바다와 대면했다
바다의 위로를 읽었다
바람 부는 날의 바다는 나의 왼쪽엔
비가 오는 날의 바다는 나의 오른쪽에
 

팽개치고 있던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날이다
새롭게 시작하는 허무
1월 1일의 처신, 1월 1일의 정처

 
맑고 파란 바다의 두터운 내막은
불우, 깊이 구질구질하다
먼 친척의 우환까지 확인하고
 

상경하는 1월 1일은 소금에 잔뜩 절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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