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눈물에 금이 갔다 - 김이하 시집

마루안 2018. 1. 7. 20:31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시집이 오래오래 내 마음을 사로 잡고 있다. 딱 무슨 책을 구입해야지 하는 생각이 아닌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가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헌책방을 들른다.

 

사람도 그렇지만 책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어 만날 책이면 언젠가는 만나고 못 만날 책은 평생 가도 엇갈리기만 할 뿐이다. 내 발로 들어간 책방이건만 마치 이 시집이 오랫동안 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싶다. 

 

이 시집 표지처럼 보라색을 보면 슬프다. 고귀함이나 귀족을 상징하는 색이면서 선뜻 선택하기 망설여지는 우울한 색이 보랏빛이다. 이것은 학자들이 정한 미학이나 심리학으로 접근한 이론이 아니라 그저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생각일 뿐이다.

 

어쨌든 이 시집을 읽으면서 한 무명 시인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도 시집 구성도 단촐하나 맑고 투명한 슬픔을 잔뜩 머금은 시집이다. 어쩌다 한 시인에 꽂히면 이력에서부터 정체성까지 궁금증이 폭발한다.

 

시집 읽는 도중에 허겁지겁 시인의 정보를 찾았다. 이 시집이 네 번째란다. 이전에 나왔던 시집 제목이 하나 같이 특이하다. <내 가슴에서 날아간 UFO>, <타박 타박>, <춘정, 火>,, 메이저 출판사가 아닌 무명 출판사에서 시집을 낸 것도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잘 나가는 인기 시인보다 이렇게 들꽃처럼 숨어 있는 시인에게 마음이 간다. 하나씩 찾아 읽은 이전의 시집에서도 한결 같이 시인의 맑은 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진보적 사고를 곳곳에서 발견한다.

 

 

*내가 어떻게 왔는가
들여다보자니 기억의 거울은 까맣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그 길 끝처럼 찰나에 풍경을 버리고
까마득하다, 승냥이 울음에 귀만 먹먹하다
그러다 까무룩 죽어가는 삭정이 하나
눈에 밟힌다

*시/ 근심의 진화/ 일부

 

*봄이라고, 한 가지 피운 꽃 보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는 길
목련도 나무 한 가득 제비 주둥이를 내민다
별일 없다, 누군가 전화기에 대고 중얼거린다
이 봄 별일 없다

(.....)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다 들킨
새들처럼 문지방을 넘다
엎어진다, 고장난 몸 하나
봄이라고 꽃바람 마시다 열꽃 핀 몸 하나
이쪽에서 저쪽을 못 건넌다

 

*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일부

 

 

*훔친 눈물은 눈물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가까이 가 버렸던 그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고 가 버리는 표정 없는 얼굴

나는 모르겠다, 자꾸만 멀어지는 길을 가는

그 맘, 너는

멀어서 그리운

 

*시/ 너는 너무 멀다/ 일부

 

 

글에 모든 것이 담긴 것은 아니겠으나 어느 정도 그 사람의 정체성을 감지할 수 있다. 아마도 이 시인은 사슴 같은 심성을 가졌지 싶다. 물질만 쫓는 세태에서 이런 무공해 시인도 드물지 않을까. 발문이나 해설 대신 뒤편에 실린 시인의 말을 대신한 짧은 산문에 이런 문장이 있다.


*허방 같은 징검다리를 건너온 저 세월이 끔찍하다. 언제나 힘겹고 두려왔다. 
난, 왜 이렇게 살아왔는가. 결국 살아온 게 아니라, 등을 떠밀려 온 생이었다.
나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이 봄과, 이 지독한 봄날을 겪는 또 다른 계절을 걸어가려면 위로가 필요하다.

 

이 시집으로 내가 위로를 받았는데 시인도 위로가 필요한 모양이다. 이 블로그가 누구와 소통하기 위함보다 내 일기장 같은 곳이라 이 글을 시인이 읽을 턱이 없겠으나 모쪼록 건필하라고 시인에게 위로를 보낸다. 뒷 표지에 박힌 동료 시인의 추천사가 딱 내 마음이다.

 

*빈방은 눅눅하지만, 이 빈방 있어 우리는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비정한 현실에 치인 쓸쓸함이라든지 외로움들에게 이 피정은 든든한 움집일 것이다. 그러니  김이하라는 저 빈방, 그늘에 머무는 이 애틋함을 어찌 쉬 버릴 수 있으랴. 다만, 저 빈방에 재잘거리는 햇살들도 가끔은 찾아오기를. 더 오래오래 우리 함께 숨쉬기 위해. *정우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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