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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센 날의 풍경 - 강인한

바람이 센 날의 풍경 - 강인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이다 플라타너스는 플라타너스대로 은행나무는 은행나무대로 바람 속에 서서 잃어버린 기억들을 되찾으려고 몸을 떨며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흘러가 버린 저녁 구름과 매캐한 소문과 매연과 뻔한 연애의 결말들은 길바닥에 차고 넘쳐 부스럭거리는, 창백한 별빛을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겠노라고 때 이른 낙엽을 떨군다 조바심치면 무엇하느냐고 지난겨울 싹둑싹둑 가지를 잘린 나무들은 눈을 틔우고 잎을 피워서 파닥파닥 할 말이 많은 것이다 할 말이 많아서 파닥거린다 춤을 춘다 물 건너간 것들, 지푸라기들 허공을 날아 높다란 전깃줄에 매달려 몸부림치고 소스라치는 저 검은 비닐들을 이제는 잊어야, 잊어야 한다고 빗금을 긋고 꽂히고 내리꽂히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부러져 버린..

한줄 詩 2018.01.20

봉천동 파랑새 - 김응수

봉천동 파랑새 - 김응수 버스에서 내려 얼어붙은 보도를 미끄러지며 내려가면 연탄난로 모글모글 피어오르는 순댓국집 국물을 불며 소주를 나누어 마시면 시상만은 불길처럼 올랐다 포개지듯 드러누운 고만고만한 집들 사이의 약국 옆 주차장에 세 들어 살던 형 셔터를 열면 세상은 그만큼 열렸다 약국아가씨를 좋아하던 형은 아픈 데도 없이 박카스를 사오고 손잡이에 놓인 돌멩이를 치우곤, 간혹 거렁뱅이가 셔터를 올려 놀라곤 했다 여주인은 순댓국 푸기에 바쁜데 주인 남자는 소주를 들이키며 금달래 이야기를 했지 낙성대 입구에 살던 조금 모자라던 처녀 이놈, 저놈이 꼬드켜 아랫도리를 벌리더니만 떼기를 너덧 차례, 오늘은 어미가 못 참겠다며 배꼽수술 해버리고 왔다고 하는구만 소주 한잔을 마시고 교차로 쪽 둔덕을 미끄러지며 기어오..

한줄 詩 2018.01.19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 전대호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 전대호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내가 어깨너머로 들은 바에 의하면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친구를 면회하러 구치소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던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어깨너머로 들려오던 재소자 가족들의 대화를 간추려 보면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못되 먹은 가축처럼. 그러나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복(法服) 앞에서도, 단두대 앞에서도, 화형틀에 묶여서도 나는 억울하다고 일관되게 목 놓아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나는 만인이 법 앞에 억울하다 하는 걸 들었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든 그들이 전부 거..

한줄 詩 2018.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