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 전대호

마루안 2018. 1. 17. 22:30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 전대호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내가 어깨너머로 들은 바에 의하면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친구를 면회하러 구치소에 가서

차례를 기다리던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어깨너머로 들려오던

재소자 가족들의 대화를 간추려 보면

만인은 법 앞에 억울하다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책임감도 없이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못되 먹은 가축처럼.

그러나 그들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법복(法服) 앞에서도, 단두대 앞에서도, 화형틀에 묶여서도

나는 억울하다고 일관되게

목 놓아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봄날의 두 시간 동안 나는

만인이 법 앞에 억울하다 하는 걸 들었다

세상은 살 만한 곳이 아니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것이든

그들이 전부 거짓말쟁이든

결론엔 변함이 없다.

 

 

*시집, 가끔 중세를 꿈꾼다, 민음사

 

 

 

 

 

 

상처 - 전대호


1
버스가 급하게 모퉁이를 돌았다. 옆에 선 사내가 근육을 긴장시키며 손잡이를 움켜쥔다. 사내의 팔뚝에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 보인다. 둥글고 큼직하게 주위 살들을 잡아당기며 아문 흉터가 세 개 일렬로 박혀있다. 언제였던가 나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많이 먹고 친구들 앞에서 고통을 참으며 독하게 지졌었다. 상처는 많이 부풀어올랐다. 며칠 동안 팔 전체가 화끈거렸고, 화끈거렸지만 아무 흉터도 남지 않았다.

햇살 내리네 저 햇살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따사로운 햇살

사내는 아마 물집이 생긴 자리를 세 번 이상 더 지졌을 것이다. 아무도 근접 못할 만큼 무시무시한 기억을 훈장처럼 팔뚝에 새겨 넣기 위하여 사내는 아까처럼 근육을 긴장시키며..... 이를 악물었을 것이다. 젖은 숫돌처럼.

2
지나간 일들은 정말로 지나가 버린다. 그날에나 지금에나 햇살 저 햇살,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만 있다. 그런 식의 무례한 작별 인사는 그를 자꾸 뒤돌아보게 했다. 들꽃에게라도 말 걸고 싶은 발걸음. 얘 너도 집이니? 아니 나는 성(城)이야. 지나간 일은 일도 아니다. 기억만 고대 인류의 꼬리뼈처럼 진화의 문턱에서 흔들거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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