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 정덕재 시집

마루안 2022. 2. 10. 19:26

 

 

 

나는 유행 따라가는 데에 젬병이다. 최신 휴대폰이 나왔다고 바로 달려가지 않는다. 심지어 새폰으로 바꿀 때도 한두 해 지난 구형 모델을 선택한다. 옷이나 구두, 시계 같은 패션 유행과 속칭 핫플이나 맛집에도 별 관심이 없다. 그래도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딱 최신 상품에 관심을 두는 것은 출판물이다. 지독한 활자중독자라고 할까. 단 하루도 시집을 펼치지 않거나 글을 읽지 않으면 밥을 굶은 것처럼 허전하다. 만 원짜리 점심 메뉴와 만 원짜리 시집 중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 시집을 집는다.

 

물론 굶으면서까지 책을 읽고 싶지는 않다. 김밥같은 싼 메뉴로 끼니를 때울지언정 관심 가는 책을 외면하지 않는다. 읽고 싶은 책을 사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진 않으나 책 읽을 시간이 가난한 것은 맞다.

 

그동안 시간을 낭비하며 너무 게으르게 살았다.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빨리 늙는 것이 눈이라는데 읽을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읽을 일이다. 어쩌다 이 시인에게 관심을 두게 되었다. <대통령은 굽은 길에 서라>라는 시집을 얼마전에 읽었다.

 

시집 후기를 쓸 정도는 아니었으나 시대를 꿰뚫는 촌철살인의 문장은 인상적이었다. 대선 열기가 한창인 요즘에 읽을 만한 시집이다. AI 시대여서일까. 내 관심 분야를 기가 막히게 알고 광고가 뜬다. 골프 용품이나 옷 광고보다 책 광고가 대부분이다. 

 

연말연시에 다소 정신이 없어 시집 읽기에 소홀했는데 이 시집은 불쑥 뜬 광고 덕분에 알았다. 출판사 걷는사람이 역사는 짧으나 좋은 시집을 많이 내고 있다.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이라는 이색적인 제목처럼 정덕재 시는 천연덕스러운 되치기가 능수능란하다.

 

시인이 최근 시집도 자주 내고 있지만 시 또한 완전 물이 올랐다. 이 시집이 그렇다. 한동안 시를 쓰지 않던 사람이 50대에 시를 쓰기로 작정을 했는지 물 오른 시집의 정점이다. 때론 비겁하거나 때론 이기적인 소시민의 일상이 따뜻한 시선으로 펼쳐진다.

 

세상이 내 위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또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시 한 편에서 나를 보기도 한다. 아니 많이 보인다. 그만큼 이 시인의 시가 억지스럽지 않아 바로 공감이 간다.  

 

 

*외로움은

혼자라서 오는 게 아니라

갈 길이 막힌

절벽처럼 다가오는 법

 

*시/ 치약이 나오면/ 일부

 

 

*목놓아 울었더라면

쓰러지지 않은 직립의 마음으로

탄식과 절망을 붙드는

버팀목이 됐을 것이다

모멸의 순간과 굴욕의 시간과

빛나는 별빛을

악마의 먹구름으로 가려 준 장벽의 의지는

고통을 견디는 방법을 전수했을 것이다

 

*시/ 위대한 나무/ 일부

 

 

공감 가는 시가 여럿이지만 이 두 편의 시 일부를 건진 것만으로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 시인의 정체성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지는 시 한 편이 눈에 띈다. 틀린 짐작이라해도 상관 없다. 읽어서 내가 좋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의 구성물질 - 정덕재

 

인간의 몸이 70%가 물이라면

30%는

불이어야 한다

 

들판을 휘저은 민중의 역사가

위대한 물결이라면

나머지는

혁명의 불꽃이어야 한다

 

한 줌의 재를 손에 넣고

한 줌의 재를 남기고 가는

인간의 구성물질은

물과 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