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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게 부서지다 - 차영호

잘게 부서지다 - 차영호 머리칼 까만 그믐밤에도 동산 솔숲 아래께가 훤한 것은 새똥처럼 흩뿌려진 추억들이 조곤조곤 부서지고 있기 때문 장대비 멎은 저녁답 끄무레한 벌판을 휙휙 나니는 도깨비불은 누군가를 깊이 연모(戀慕)하는 넋이 누군가를 향하여 부서지는 것 별들도 태초의 어둠덩어리가 잘게 부서진 연유로 반짝거리고 오래 움츠렸던 기다림이 잘게, 잘게 부서질수록 화안해지는 꽃 아가야, 이 저녁 내 얼굴이 환해짐도 먼발치에서 일렁이는 물결에 가슴속 켜켜이 쟁여진 응어리가 푸석푸석 부서져 내리는 까닭이라면 잘게 부서진 것들은 모두 반짝거리고 깊이 모를 사랑은 늘 서늘한 것이로구나 *시집, 애기앉은 부채, 문학의전당 망두석 - 차영호 그 해 눈 속 장고개 외딴 터에 든 밤손님 순경 출신 아부지가 지게꼬리로 오라 ..

한줄 詩 2018.02.15

스물 아홉 살에 - 김경미

스물 아홉 살에 - 김경미 -12월 31일 까닭없이 불안하고 구차스럽고 참담까지 한 이십대가 이제 다신 오지 않으리라 안도하여 나는 오늘 서른이 반갑습니다 누가 내 서른에 혀를 차겠습니까? 때로는 스물 한 살, 어리석어 붙들리는 치기범이 되고 어느날은 아마 새치기꾼을 눈물 나는 국산 극장 앞에서 마흔살의 암표를 사고 있을 겁니다 끝내 평균대 위에서 맘대로 춤추는 선수 그 노련한 삶과는 거리가 멀겠지만 무조건 그리 될 줄 알았던 삼십세 새물 먹고 돌아온 고통과 악연과 서로 까닭을 밝히리라 너무나 빨리 되고 싶었던 서른살 시시덕대는 척하면서 울면서도 내 안이 내 밖이 합쳐질 조짐 술렁대는 삼십대를 뒤지며 살게 되겠지요.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실천문학사 청량리 588번지 - 김경미 그대 몸..

한줄 詩 2018.02.15

가까운 듯, 먼 듯 - 나호열

가까운 듯, 먼 듯 - 나호열 어제는 눈 내리고 오늘은 바람 몹시 불었다고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나지막한 음성에 놀라 창 밖을 보니 백운대, 인수봉이 가까이 와 있다 늘 마주하는 이웃이지만 언제나 찾아가는 일은 나의 몫 한 구비 돌아야 또 한 구비 보여주는 생은 힘들게 아름다워 휘청거리는 그림자에 등 내밀어주는 침묵 뿐 이더니 곧게 자란 몇 그루 소나무 위의 잔설을 털며 몇 년 묵었어도 아직 향기 은은한 작설 잎을 구름에 씻어낸다 멀리 떨어져야만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람 한 걸음에 다가가면 홀연히 모습 감추는 사람 혹시, 하고 물어보니 눈보라 헤치며 홀연히 자리를 뜬다 간 밤의 긴 갈증 머리 맡에 냉수 한 사발은 그대로인데 *시집,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포엠토피아 그 겨울의 찻집 - 나호열 이..

한줄 詩 2018.02.15

내 이마의 청동거울 - 임곤택

내 이마의 청동거울 - 임곤택 나무에서 왔으므로 나는 아름답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하라는 충고들이 말꼬리를 잘랐다 가장 굵게 잔뼈가 자란 거리의 이름을 수십 번 부정하고 가르마를 바꾸고 오른손을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도 닮고 싶지 않았다 발밑이 땅이 아니라는 느낌 어떤 연륜도 뿌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 풀밭에서 듣는 울음소리 원시의 발자국과 무인도의 유칼립투스, 사그락거리는 태고의 모래 해변 내 기억이 아니라는 것 당신은 내 이마 위에 당신의 살이었던 서랍과 빈 상자들 속에 녹청색 어금니와 불안하게 회오리치는 잎맥을 넣어두었다 그렇게 나는 플라타너스를 좋아하고 자주 하늘을 보았다는 것 어깨에 떨어진 빛을 발밑에 묻고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 손끝으로 털고 남는 자랑은 당신에게 돌려줄 것이다 ..

한줄 詩 2018.02.15

버리고 갈 것만 남아 - 최정

버리고 갈 것만 남아 - 최정 냉장고는 고장난지 오래 세탁기는 덜컹덜컹 자주 멈추고 텔레비전 버튼은 잘 눌러지지 않아 다행이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언제고 떠나려 새것 사지 않아 다행이다 아니, 사실은 다행이지 않다 쓸 일 없어진 침대도 들춰본 지 오래된 책들도 하다못해 서랍에 넣어둔 각종 고지서들도 일일이 확인해 버려야 하고 느려 터진 컴퓨터를 버릴까 말까 도시를 청산하는 일에 버릴 것만 남아 숨만 쉬고 사는 데도 돈을 청구하는 도시에게 조금은 시원섭섭하고 버릴 것들마저 돈으로 계산해 주는 도시에게 차라리 감사해 하며 무엇을 더 버릴까 궁리하는 하루 내 마음에서는 무엇을 버리고 갈 것인지는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날이 저문다 굽이굽이 산을 넘어야 하는 깊은 산골에서 늦깎이 농부로 살아남으려면 한 줌 흙..

한줄 詩 2018.02.15